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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인사이드 Apr 16. 2021

[인사이드] 한국 최초 커피숍, 근대 新문화의 창구

한국 최초의 커피숍과 호텔
기네스북 등재된 호텔
한국 호텔의 역사


#한국호텔역사 #한국최초호텔 #호텔인사이드



안녕하세요. 호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호텔인사이드의 에디터 수입니다. 이번 호텔인사이드 특집에서는 한국의 호텔역사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니다. 개항 후 신 문화의 창구이자 세계 각국의 외교의 장이 되었던 호텔. 한국 최초의 커피숍을 열었고 대한민국 관광산업의 토대가 된 호텔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볼까해요. 이번 포스팅은 한국 근대사 및 커피의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알아두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게요!




1. 한국 최초의 호텔, 

인천 제물포 대불호텔 - 1885년

19세기 대불호텔 모습 /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대불호텔은 1883년 개항 후, 당시 개항지였던 오늘날 인천의 제물포항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호텔입니다. 당시에는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외교사절단과 여행객들이 배를 통해 인천에 도착하면 수도인 서울까지 말을 타고도 꼬박 하루를 가야 했어요. 외국인들이 처음 한반도 땅을 밟고 편안한 휴식을 취한 후 이동할 수 있도록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대불(大佛) 호텔입니다.


호텔의 설립자는 호리 리키타로라는 일본인이었는데요. 외관은 일본식이 아닌 서양식 3층 벽돌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서비스 또한 일본어나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행해졌고 식당에서는 깔끔하고 정갈한 서양식 식사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커피를 판매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정확한 메뉴판이나 유물이 없어서 고증이 안된 상태이지만, 서양식 식사를 제공했다는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아마도 커피도 함께 제공을 했을 것이라고 사학계는 추측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만약 사실이라면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로 커피를 판매한 곳이 되겠죠. 객실은 침대가 놓인 11개의 방과 다다미(마루방에 까는 일본식 돗자리)가 깔린 240개 객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네요.

1899년 경인선 개통 이후 숙박 수요가 급감하여 경영난을 겪다가 1918년 중국인에게 팔렸고, 토지를 매입한 중국인이 1978년까지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로 식당을 영업했습니다. 당시 중화루는 '인천 3대 식당'이라고 불릴 만큼 맛집으로 소문나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하네요. 1978년 근대화 물결로 건물이 헐린 후에는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가 최근 상가 신축을 위해 터파기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옛 기단부가 발견되면서 공사가 중지된 체 방치되어 있습니다. 

대불호텔 터 /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해당 부지가 사유지로 묶여있어서 복원과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네요.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된 대불호텔 터의 황량한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의 근대사와 커피사에 중요한 문화유적지인 대불호텔 터가 조속히 한국의 사학계에서 제대로 연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 경성 최초의 커피숍

'미스터 선샤인' 글로리호텔 모티브 

손탁호텔 - 1902년

서울 손탁호텔 전경 / 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손탁호텔은 1885년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를 따라 한국에 온 프랑스계 독일 여성 앙투와네트 손탁에 의해 지어진 호텔입니다. 그녀는 베베르의 처형으로서 러시아어와 독어, 프랑스어에 능통하였고 빠른 속도로 한국어도 익혔습니다.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궐 내에서 양식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게 되고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1889년 고종에게 정동의 가옥을 하사받게 되죠. 이 가옥을 양옥으로 개조하여 외국인들의 접대 장소로 사용한 것이 바로 손탁호텔의 시작입니다.

손탁 여사와 손탁호텔 입구 / 사진출처: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건물은 2층으로 지어졌는데 2층은 황실 귀빈들을 위한 접대 공간, 1층은 보조 객실과 식당 및 회의실, 커피숍을 갖춘 공간으로 지어졌습니다. 손탁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이름 앙투와네트 손탁(sontag)에서 따온 것이죠. 손탁호텔은 손탁빈관, 한성빈관으로도 불리며 구한말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 배후 조종을 위해 이곳에 머무르면서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내 각종 회유와 협박을 하기도 하였고 러일전쟁 당시에는 영국의 수상인 윈스터 처칠이 머물렀던 곳이기죠 하죠. 또한 미국의 주축으로 결성된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정동구락부: 이완용, 서재필, 민영환 등 국내 인사와 미국 공사실, 프랑스 공사 블랑시,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이 참여한 모임으로 표현상은 친목모임이었으나 내적으로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모임

손탁호텔 전경 / 사진출처: 주독한국문화원

호텔의 주인이었던 손탁은 1904년 러일전쟁 패배로 인해 호텔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1909년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결국 1918년에 호텔은 문을 닫게 되죠. 이후 바로 옆에 위치한 이화학당이 호텔을 매입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3년 프라이 홀(Frey hall)을 짓기 위해 건물을 철거하면서 손탁호텔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프라이 홀 전경 / 사진출처: EHWA MUSEUM

안타깝게도 프라이 홀이 1975년 불의의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터에 표지석만 남아있는 상태이고 옆에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네요. 손탁호텔은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글로리 호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다른 재밌는 사실은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주한 러시아 대사 베베르에 의해 처음 커피를 맛보고 이후 커피를 즐겨마셨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손탁호텔은 경성 최초의 커피숍을 갖춘 공간으로서, 고종이 자주 이곳에서 커피를 마셨다고 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글로리 호텔 사장이었던 쿠도 히나
손탁호텔 터 비석


3. 기네스북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 호텔
한국 최초 근대식 호텔, 

웨스틴조선호텔 서울 - 1914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전경 / 사진출처: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홈페이지

앞서 말씀드린 두 개의 호텔이 외국인이 운영했었고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호텔이라면, 이제부터 소개해드릴 호텔은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는 곳들입니다.


서울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 조선호텔은 1914년 일제강점기 당시 환구단* 자리에 세워진 조선철도호텔이 전신이며 당시 조선 총독부의 철도국이 관리했습니다.


*환구단: 대한 제국의 성역으로서 유교 전통에 따라 왕이 제사를 지내던 자리이며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올린 곳

1914년 개관 당시 조선호텔 모습 / 사진출처: 코리아헤럴드

해방 후인 1945년에 조선으로 관리권이 넘어와 미 군정 사령부로 쓰이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통부가 관리하여 호텔 이름을 Chosun Hotel로 개명하게 되죠. 1963년에는 국제 관광공사로 이전되고 1967년에 아메리칸 항공과 신관 건축 후 독립법인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1970년 20층 건물로 개관을 하면서 1981년 외국인 투자자인 웨스틴호텔과 제휴를 맺으며 '웨스틴 조선호텔'로 개칭을 하죠. 그 사이 삼성이 한국 측의 지분을 인수했다가 1991년 신세계가 독립을 하면서 삼성 측의 지분과 웨스틴 투자 지분을 완전히 인수하고 현재 조선호텔앤드리조트(구 신세계 조선호텔)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과 앞에 위치한 황궁우 / 사진출처: Luxury Link

예전 호텔의 모습은 서구식과 한국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4층 건물이었다고 해요. 객실 수 67개, 수용인원은 106명, 내부에는 대형 식당과 사교실, 난방/소방 시설과 주차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땅한 호텔이 없던 당시 웨스틴 조선호텔은 1950년대까지 큰 호텔로서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과 여행객들을 맞아들였고 한때 유엔군이 사용하기도 했었다고 하네요.

옛 조선호텔 선 룸 (sun room)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 사진출처; 코리아헤럴드

웨스틴 조선호텔은 큰 규모의 정식 회의가 열린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최초 근대식 호텔이며 최초의 엘리베이터, 댄스파티 등 수많은 '국내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내며 대한민국의 신문화 수입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었죠. 또한 한국외식문화의 탄생지로서 당시 호텔에서 선보였던 프랑스 요리는 재료 정선과 조리법이 매우 뛰어나 외국인들이 늘 찬탄을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웨스틴조선호텔은 '한국 최고(最古) 호텔'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어 있고, 현재는 지상 20층과 지하 1층, 객실 수 462개, 5개의 레스토랑 및 라운지 바를 갖추고 있습니다.




4. 한국 최초 '그랜드'호텔,  

현존하는 최초 민영 호텔
금수장호텔 - 1955년

그랜드엠버서더풀만 - 1987년

그랜드 엠버서더 풀만 서울 전경 / 사진출처: 엠버서더 그룹 홈페이지

그랜드(Grand)는 프랑스어로 크다, 위대하다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호텔 앞에 그랜드 Grand라는 말이 붙게 된 것은 19세기 증기선과 기차의 발명과 관련 있는데요. 국제적인 교통수단이 생김으로 인해 글로벌 비즈니스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외국인 사업가들의 해외 출장이 늘어납니다. 외국인들이 현지에서 장기간 머물며 각종 접대와 식사, 연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랜드 호텔'인데요. 즉 그랜드 호텔은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외국인들이 한 곳에서 공통된 매너를 가지고 편히 생활할 수 있도록 각종 부대시설과 고급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갖춰진 곳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 그랜드 호텔인 엠버서더 풀만의 전신은 1955년에 문을 연 금수장(錦繡莊) 호텔입니다. 금수장호텔은 한국의 엠버서더 호텔 그룹이 한국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폐허 속에서 외국인 관광객 유입 증가에 맞춰 관광 한국의 꿈을 가지고 개관한 호텔이죠. 순수 국내 민간 자본에 의해 지어진 민영 호텔로서 2층 건물에 19개 객실을 가지고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호텔 서비스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1965년에 호텔명을 엠버서더로 바꾸고 몇 차례의 증축으로 450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 됩니다. 참고로 호텔명을 엠버서더(Ambassador)로 바꾸게 된 이유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라는 의미와 함께, 전화번호 영문판 맨 앞에 상호를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옛 금수장 호텔 모습 / 사진출처: 엠버서더 호텔 그룹

1987년, 프랑스의 글로벌 호텔그룹인 Accor 사와 합자 투자 계약 체결로 Accor사의 호텔 브랜드인 풀만과 노보텔, 머큐어, 이비스 등의 브랜드를 국내에 도입하게 되고 이때 금수장 호텔은 지금의 그랜드 엠버서더 서울 어소시에이티드 위드 풀만 호텔(Grand Ambassador Seoul associated with Pullman)으로 재단장 하게 되지요.

그랜드 엠버서더 서울 풀만 온돌룸 전경 / 사진출처: 엠버서더 그룹 홈페이지

호텔은 서울의 중심인 장충동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 시청, 광화문, 동대문, 명동, 남산 등 주요 지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413개의 객실과 6개의 레스토랑과 바, 실내 수영장, 스파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호텔 안에는 옛 금수장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시간이 되신다면 이곳에 들러 한국의 호텔 역사를 알아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금수장 박물관 사진 / 사진출처: 호텔앤레스토랑 매거진


이렇게 한국 초창기 호텔들과 함께 한국의 호텔 역사를 공부해봤는데요. 저는 포스팅을 작성하면서 한국의 근대사도 함께 알게 된 것 같아 뿌듯했답니다. 개항 후 각국의 신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었던 호텔들 그리고 그와 함께 성장한 한국의 관광산업을 돌아본 시간이었어요. 안타깝게도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호텔들도 있지만 아직까지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남아있는 호텔들이 있고, 그 안에 숨겨진 스토리를 알게 된 것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정동에 남아있는 신탁 호텔 터와 그랜드 엠버서더 풀만에 있는 금수장 박물관을 꼭 한번 방문해봐야겠어요!

이 포스팅이 재밌고 유익했다면 공감과 댓글 부탁드리고 저 에디터 수는 다음에 더 유익한 호텔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다시 만나요!

Written by. 에디터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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