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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Feb 16. 2016

길에서 태어나_수체아바,루마니아.

서쪽이고 싶은 동쪽,발칸_[46]

“죽기 밖에 더 하겠어?

난기류에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 손톱이 빠져라 팔걸이를 아무리 움켜잡아도 멈춰지지 않았던 전율에 대하여, 타이어의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진 낡은 버스를 타고 천길 낭떠러지 절벽 위를 달렸을 때의 두려움에 대하여, 바닷물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나무배에 앉아 온 몸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파도를 거스르며 칠흑 같은 바다로 향했던 그 새벽의 공포에 대하여 “그래 봤자 죽기 밖에 더 하겠어?” 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렵다. 죽는 순간에 내가 느낄 고통이 두렵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두려워 아마 나는 죽기 전에 죽을 것이다. 고기를 먹지 않은지 올해로 만 십일 년이 되었다. 젠체하느라 어쩌면 그 전의 나는 죽음 따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치기 어린 행동으로 닉 버그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영상을 보았고, 그것은 너무나 끔찍해서 세상에 태어나 내가 겪은 가장 공포스럽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잊고 싶은 경험이 되었다. 그 선득한 기억은 여전히 아무 때나 불쑥불쑥 찾아와 나를 괴롭힌다. 그 무렵 돼지가 콜레라에 걸렸다.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파란 비닐천을 깔고는 산 돼지들을 구덩이로 몰아 넣었다. 돼지들은 특유의 꽥꽥거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구덩이 벽을 기어 오르려 몸부림쳤지만 그곳은 너무나 가파르고 미끄러워 쭉쭉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인간이 그렇듯 짐승이 느낄 죽음의 공포 때문에.


루마니아에는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보았던 발칸의 모든 아름다움이 집약되어 있었다. 빛나는 들판, 높고 거친 산, 맑고 차가운 바람, 동그랗고 우아한 구름, 푸른 초원, 수많은 가축들, 키 작은 집들, 그리고 쭈글쭈글한 얼굴들. 나의 가슴을 미친 듯이 뛰게 했던 이 모든 것들이 온전한 균형과 아름다운 조화로 그 여름의 끝자락 그곳에 있었다. 마을을 지나고 평야를 달리며 우리는 연신 탄성을 내질렀고, 깊은 산 속 키 큰 나무 사이로 난 어둑한 길을 지날 때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루마니아의 대단한 자연과 거대한 부쿠레슈티와 유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불편한 렌터카에 앉아 엉덩이가 저려도, 무릎이 쑤셔도, 갈 길이 까마득히 멀어도 우리는 즐겁기만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이름 모를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산꼭대기 산전에도 곡식은 누렇게 익고 있었다.


300km 남짓,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를 가는데 여덟 시간 넘게 걸린 이유는 길 곳곳에 있었다.


얼굴이 보고 싶어 말 가까이 다가갔다. 침과 콧물이 말라붙은 허연 얼굴을 하고 꼬맹이가 쪼르륵 달려와 우리를 감시했다.


본 적 있나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다리를.


카르파치아 산맥 골짜기를 따라 한참 동안 달렸다.


길가에 쓰레기 하나 없는 말끔히 정돈된 작은 마을들을 지났다.


'하루에 한 번 오려나?' 국도변 어느 마을에 채소 트럭이 서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 끼어 자두 천 원어치를 샀다.

“꼬마야, 손에 들고 있는 그게 뭐야?”

모두들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채소 장수는 아이에 손에 들려 있던 것을 부욱 찢어 자두 봉지에 함께 넣었다.


한 아줌마가 내 등을 쓸고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유난히 밝은 노란색이었다.


해바라기씨였어요. 날 것으로 먹어요.


겨울 준비.


땅 매매. 333평.


카르파치아 산맥을 서쪽에 둔 루마니아 북동부 지역은 과거 몰다비아 공국의 일부였다.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 공국을 다스렸던 슈테판 대제는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승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덕분이라 믿어 수도원이나 교회를 새로 짓게 하였다. 몰다비아의 주도였던 수체아바에 넓게 흩어져 있는 교회들 중 여덟 곳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올라 있는데 교회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벽에 도배하듯 그려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이른 아침 시기쇼아라를 떠나 여덟 시간을 달린 이유가 바로 그 교회들이었다.


땜질로 울퉁불퉁한 카르파치아의 산길을 완전히 내려오니 제법 매끈하게 닦인 평평한 도로가 이어졌다. 산간 마을들과 비교해 꽤 번듯한 소도시를 지났고 주유소나 트럭 정비소 등이 너른 들판을 마주 보고 있는 시 외곽을 달릴 무렵에는 드디어 도저히 줄어들 것 같지 않았던 GPS의 남은 거리와 남은 시간이 한 자릿수가 되었다. 목적지에 곧 도착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차창을 활짝 열고 넓게 펼쳐진 누런 들판을 보고 있을 때였다.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털이 누런 개는 차도 가장자리에서 몸을 한껏 움츠린 채 몸을 차도 안으로 들여놓지도 그렇다고 빼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찻길 안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개를 발견하고 남편에게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우리 앞을 달리던 차가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앞 차가 비켜간 자리, 차도 한복판에 검은 개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차에 치인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직 숨통이 붙어있는 그 아이는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몸을 바르르르 떨며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입을 벌리고 힘겹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헉헉거리는 주둥이와 우리를 보는 듯한 젖은 눈이 그 고통과 두려움을 말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해가 우리 등 뒤에 있어서 모든 것이 죄다 모질도록 선명했다. 미칠 것 같았다. 엉엉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계속 울었다. 


얼이 빠진 상태로 보로네츠 수도원에 도착했다.


의무감에 입장료를 냈고 사진을 찍었다.


‘보로네츠 블루’는 집에 와서 사진으로 보았다.


달리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만은 않았다. 마차가 흘리고 간 건초 뭉치에도 흠칫흠칫 놀라게 되었다.


또 다른 수도원인 몰도비차는 다음날 아침에 가기로 하고 수도원 앞에 방을 구했다.


“어디서 왔니? 나는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지척에 있었다.


수도원이 없었다면 관광객이 찾을 리 없는 작은 마을


가까운 곳에 식당이 없다고 했다. 같은 숙소에 묵는 독일에서 온 한류 팬 소녀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숙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통해 2km 거리에 간이 식당 하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나섰다.

 




석양이 시무룩한 우리의 얼굴을 금빛으로 빛내며 따스하게 덥혀 준 것은 잠깐 동안이었다. 동산 너머로 해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어둠과 추위가 밀려왔다. 그만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저 안쪽 멀리에서 빛나고 있는 작은 네온이 눈에 들어 왔다. 혹시나 싶이 찾아가 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호텔이었고 다행히 일 층에 식당이 있었다. 식당은 동네 사람들의 모임 장소 같아 보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찾아와 가볍게 한잔 하고 가는 그런 곳이 아니라, 곗날에나 모이는 그런 곳. 어깨에 뽕이 들어간 가죽 잠바나 역시나 과장된 어깨의 구식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모여 악수와 술과 담배를 나누었다. 우리는 축 쳐진 기분을 달랠 요량으로 메뉴 중에서 그래도 좀 값이 나가는 음식을 각각 주문했는데 한참을 기다려 받은 음식은 담아 낸 모양만 다른 똑같은 요리였고 맛도 없는 게 양만 억수로 많았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으니 잠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새벽녘에 깬 김에 별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발코니에 나가 보았지만 눈이 어둠에 적응을 하기도 전에 너무나 추워서 다시 방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팔월 하순, 시골의 새벽은 한겨울만큼 추웠다. 몇 킬로그램은 될 것 같은 이불 속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덜덜 떨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 산책을 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개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져 우리를 따랐다.

 


농촌의 시계는 도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자주 잊고는 한다.


시골 개들이 참 잘 짖는다는 것도.

 

한 줌 작은 체구의 어린 아이가 꼴을 베고 있었다.


싸한 안개 냄새와 젖은 건초 냄새에 코 끝이 시큰거렸다.


버려진 철길이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 낡았지만 추레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냥 그리 보였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 아름답지요.


몰도비차 수도원.


외벽의 프레스코화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그려졌다고 한다.


해가 비추지 않는 북쪽 벽면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오토만으로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요새처럼 지어졌다. 마을 한가운데 평평한 곳에 있으니 사다리 하나 놓으면 담을 타고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수도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수도원 주변에 널려 있었기 때문에 몰도비차 구경은 건성으로 했다.


바로 이런 것.


언덕에 올랐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흘러내린 안개가 하늘로 올랐다.


아름답지요.


물기 서린 촉촉한 풀.


언덕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그것을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났다.


고요하고 평화롭게, 선하고 무던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던 그 아침, 그 언덕에서


질겁했던 마음이 조금은 아무는 것 같았다.


                                           


+

집 없는 개와 고양이의 무덤, 루마니아.


2차 대전 후 공산주의를 채택한 루마니아는 개인 자산을 국유화 시켰다. 땅을 뺏긴 농목민들은 한때 그들의 것이었던 땅에서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고, 그것을 거부하면 몇 년씩 감옥살이를 했다. 이런 이유로 농목민들은 그들의 집과 가축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들이 놓고 간 소, 양, 닭, 말, 돼지와 같은 가축들은 정부의 소유가 되었고 쓸모 없는 고양이와 개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것은 악몽의 시작에 불과했다.


1960년대 대통령이 된 차우세스코는 북한에 다녀온 뒤 그가 북한에서 본 것들을 그대로 따라 루마니아에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산업화, 도시화, 체계화라는 명분으로 시골에서 살던 사람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고, 그들이 옮겨 올 집이 필요해지자 작은 집들을 부수고 그 자리에 거대한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를 지었다. 이는 루마니아 전국에서 시행되었는데 부쿠레슈티에서 특히 심했다.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아파트는 부족했다. 사람들은 다른 가족들과 한 아파트를 공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비좁은 아파트에 살게 된 사람들이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버려진 개들은 그들끼리 몰려다니며 새끼를 낳았고 그 새끼가 또 새끼를 낳았다. 거리는 순식간에 개들과 개의 새끼들로 채워졌다. 부쿠레슈티 시장은 길에 돌아다니는 개들의 수를 가장 빠르게 줄이는 방법으로 대량 도살을 선택했고 다른 도시들도 그걸 보고 따라 했다. 그 후 지금까지 개들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쫓기고 잡히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총을 쏴서, 목을 매달아서, 불에 태워서, 몽둥이로 때려서 개들을 죽였다. 좁은 우리에 가두어 놓고 굶겨 죽이기는 것도 흔한 방법이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보호소에서 흔히 사용한 방법은 독극물을 주사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마취 없이 심장에 곧바로 찔러 고양이와 개들을 죽였는데 운 좋은 개들은 한방에 죽었지만 많은 수가 천천히 고통을 당하며 죽었다.


루마니아가 EU 가입한 다음해인 2008년, 루마니아는 새로운 동물보호법을 재정했다. 개와 고양이를 학대, 고문, 죽이거나, 다치게 하고, 굶겨 죽이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아무도 법을 따르지 않았다. 동물보호법에 의하면 건강하지 못한 길거리 동물들은 안락사 시키고, 건강한 동물들은 중성화 수술을 거쳐 다시 거리로 돌려보내 그 개체 수를 줄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법으로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보호소에 있는 동물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동물보호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개들은 죽임을 당했고 대부분 독살이었다. 수천 마리의 개들이 동물보호소에서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그것에 대해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무능을 넘어서 관심 밖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개와 고양이를 대하는 루마니아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한 몫 했다. 그들은 개와 고양이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개는 집과 가축을 지키는 동물, 고양이는 쥐를 잡는 동물로만 생각했다.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들은 거리에서 살아도 괜찮을 거야.’ ‘원래 거리에서 살잖아.’ 라고 여겼고 다수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 


2013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부쿠레슈티에서 4살 남자 아이가 개 떼에 물려 죽은 것이다. 대중들의 길거리 동물 혐오 분위기에 정부와 언론은 부채질을 해댔고, 포획한지 14일이 지나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동물을 안락사 시킬 수 있는 새로운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으로 길거리 동물의 대량 포획과 도살은 본격적으로 사업이 되었다. 얼마나 많이 잡아 들이고 잡아 죽이냐에 따라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사업에 부패한 관료와 정치인들이 뛰어든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당초 길거리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4살 남자 아이는 사설 보안 경비 업체의 개에 의해 물려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업체는 아이의 부모에게 2.4만 유로의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루마니아의 길거리 동물들은 여전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고 루마니아는 지구에서 가장 최악의 동물학대국 중 하나이다. 법이 재정된 이후 30만 마리의 길거리 개들이 도살되었다. 20151월에는 북서부 바이아 마레 지역의 지방 정부가 운영하는 보호소에서 개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참다 못해 서로를 잡아 먹는 일이 벌어졌다. 2014년 기록에 의하면 루마니아 전체 길 개의 수는 이백 만 마리에 이르고 매년 수 만 마리의 동물들이 포획, 도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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