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이고 싶은 동쪽, 발칸_[23]
쾅! 의식을 치르듯 여권에 도장을 찍은 입국 심사관이 눈을 찡긋하며 내게 여권을 건넸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공손히 여권을 받아 들고는 그에게 물었다.
"스베티 나움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고 하던데요."
남자는 고개를 희미하게 저었다.
“길 따라 4km 직진.”
"개구멍 비슷한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공식적으로 지름길은 없어. 얼마 전에 잠가 두었거든. 공식적인 마을 입구는 4km 걸어야 나와. 근데 있잖아, 비공식적으로 말하자면 말이지..."
남자는 자세와 목소리 모두를 낮추었다.
"길 왼쪽에 붙어서 조금만 걸어가 보라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거리감과 표현법 또한 다양하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배웠다. 같은 거리를 두고도 누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하고, 누구는 걸어서는 절대 못 갈 거리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걸어도 '조금만' 걸으면 보이다던 입구가 보이지 않아 초조해진 나는, 반대 방향에서 몇 분마다 무리 지어 걸어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도대체 그 '개구멍' 어디에 있는지 물었으나, 역시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바로 저기' 혹은 '십오 분 거리'. 그렇게 인내심이 바닥에 닿기 직전, 철조망과 그 철조망 밖으로 아무렇게나 자라 삐져나온 관목들 사이에서 말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나무와 풀에 가려 내게는 보이지 않았던. 철조망이 끊어진 곳에서 웬 남녀가 도로 위로 튀어나왔을 때 '마리오의 모험'이라든가 '사라진 마야 제국을 찾아서' 따위의 모험 놀이 안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그늘 하나 없는 땡볕 아래 아스팔트 위를 힘겹게 걷다가 '띠리링'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나타난 '금화'라든가 '물약' 같은 것을 줍는 그런. 독일에서 왔다는 그들은 오흐리드에 머물며 데이 트립으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오흐리드가 어떤지 물으니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아름다워, 숙소 엄청 싸고, 음식도 무지하게 싸고, 마을 아름답고, 호수는 말할 것도 없고, 진짜 천국이야.”
도로에서 지름길로 들어와 호수를 향해 걷다 보니 요정의 늪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은밀하고 작은 물길이 나타났다. 이 물이 어디서 오고 있는지는 깊고 무성한 짙푸른 나무와 수초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오흐리드 호수의 발원지가 스베티 나움 안쪽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TV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마케도니아 편에서 진행자가 뱃사공이 노를 젓는 나무배를 타고 유유자적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발원지인 성스러운 샘을 구경했었다. 나도 그처럼 샘을 구경하러 가볼까 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러기에는 알바니아 지로카스트라 이후로 한 번도 가지 못한 화장실 볼일이 너무나 급했다. 어쨌거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가끔 시청료로 여름 휴가를 갔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들도 있지만 말이다. 비록 오줌보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지만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울려대는 그 프로그램의 타이틀 음악을 흥얼거리며 나는 호수로 향했다.
'뚜룻 뚯뚜르 뚜르 뚜룻 뚯뚜르...'
호수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작은 교회 하나가 나왔다. 예배당과 돌담에 주황색 지붕을 얹은 앙증 맞은 교회였다. 스베티 나움은 호숫가 절벽 위에 위치한 거대한 수도원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나를 안내한 독일 커플은 그 수도원을 찾다가 길을 잃어 나를 만나게 된 것이었고, 해변과 연결된 오솔길에서도 그곳의 위치를 묻는 몇 무리의 여행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마도 찾기 어려운 곳에 의문의 수도원이 있는 듯 했는데, 나중에 오흐리드에 도착해 숙소 주인 마리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나를 바보 취급하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못 찾을 수가 있어? 수도원은 그냥 길에서 보인다고!”
“나만 못 찾은 게 아니라 남들도 다 못 찾았다니까요!”
“바보들. 그걸 어떻게 못 찾을 수가 있어!”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가 내 인생 첫 호수였던 관계로 내 머릿속에 각인된 호수는 어둡고, 이끼 색의 검푸른 색조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어느 바닷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흐리드는 연한 푸른 빛으로, 때로는 코발트 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한술 더 떠 오후의 햇빛을 잔뜩 받아 수많은 별들까지 반짝였다. 사람들은 태양을 향해 벌거벗고 누워 그 충만한 기운을 실컷 받고 있었다. 그 순간 그곳의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많은 옷을 입고 나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부러웠다. 그리고 오줌이 마려웠다. 마지막으로 오줌을 싼 것이 무려 9시간 전이었는데 그동안 적당한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만사에 걱정이 많은 나는 행여나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 전재산이 들은 배낭이 없어질까 싶어 최선을 다해 배에 힘을 주었다. '오흐리드 가서 싸야지.'
나 하나만 태우고 스베티나움을 출발한 택시는 가는 길에 손님 셋을 더 태웠다. 마케도니아의 합승 택시 시스템은 키르기즈스탄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신나게 달리다가 길가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면 차를 세워 행선지를 묻고 가격을 흥정한 후 탑승. 오흐리드까지는 채 삼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운전하는 내내 조수석에 앉은 학생을 통해서 내가 가려는 곳은 시내 외곽에 있으며 자기가 운영하는 숙소가 시내의 중심이니 싼값에-15유로- 좋은 방을 내주겠다며 끈질기게 말을 전했고, 운전대를 돌리고 브레이크를 밟고 클락션을 바쁘게 울리는 와중에도 휴대폰에서 자신의 숙소 사진을 찾아내 내게 건넸다. 내가 그의 말에 시시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인지, 그는 어느 사거리에 차를 세우더니 내가 가려는 곳까지는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길이니 여기서부터 걸어가라며 차문을 열었다. GPS 맵을 보고 있던 나는 그의 뻔한 거짓말에도 그냥 차에서 내렸다. 숙소 앞에까지 데려다 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느니 차라리 그냥 걸어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나는 택시기사로부터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 차문을 붙잡고 한동안 악착같이 버텨야 했는데, 그 시비에서 내가 이기자 그는 거스름돈 오백 원을 나에게 건넨 다음 내 볼을 꼬집으며
"굿데이."
라고 인사를 하고는, 꼬집힘을 당한 어이없음에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급하게 차에 올라타 떠나 버렸다. 이런 제기랄.
오흐리드 구시가 호숫가 광장 옆, 미리 생각해 놓은 호스텔에 찾아갔으나 방이 없었다. 그들에게 마케도니아 돈을 조금 환전하고, 다른 숙소의 추천을 부탁해 놓은 다음 드디어 오줌을 쌌다. 아 시원해.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인근에서 숙소를 운영한다는 중년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은빛 곱슬머리에 잘 생긴 분홍빛 얼굴,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 한 노인이 나무배에 페인트 칠을 하고 있었다. 작은 나무배는 좁은 골목길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저것을 나중에 어떻게 옮기지 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집에 도착했다. 긴 하루를 보낸 탓에 꽤 지쳐 있었던 나는 조금은 날카로운 상태였다. 불행히도 그가 내게 준 커다랗고 오래된 아파트는 청소가 덜 된 상태였는데 부지런히 청소를 해도 모자랄 판에, 궁금한 거 많고 새로 온 손님과 대화를 나누기 좋아하는 주인장 마리얀은 먼지 하나 털고 질문 하나 하고, 수건 하나 건네고 농담 한마디 던지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말꼬리마다 버릇처럼,
"걱정 말라고, 넌 너무 걱정이 많아."
라고 했다. 그의 말버릇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그렇게 보였는지, '넌 너무 걱정이 많아.'라는 그 말에 점점 더 날이 선 나는 난생 처음 본 남자에게 화를 내기에 이르렀다.
“아저씨! 아저씨가 날 언제 봤다고 내가 걱정이 많네 어쩌네 그래요? 아저씨가 무슨 그리스인 조르바라도 되요? 왜 혼자 제멋대로 판단하고 난리예요!”
솔직히 말하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치부를 들켜 버린 당혹감에 패배감 비슷한 것이 들었던 것 같다. 울그락붉그락 씩씩대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리얀의 깊고 푸른 두 눈은 내 속을 꿰뚫은 듯 노련하게 웃고 있었다.
“걱정 말라니까, 넌 너무 걱정이 많다고.”
비록 마리얀과의 첫 만남이 으르렁거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이란 표현 말고 달리 그를 묘사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희영, 빨래할 것 있으면 줘. 세탁기 돌릴 때 같이 돌리게.”
“속옷에 뭐에 뭐에 되게 많은데요?”
“걱정 마,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아저씨! 또!”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너는 것은 제가 할게요. 팬티에 브라에 너절해서 창피해.”
“희영, 우리가 이 숙소를 언제부터 운영했는지 알아? 부모님 때부터라고. 그러니 걱정 마, 너는…”
“아저씨!!”
모두가 칭송하는 천국 오흐리드에서 매사에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의 피곤함은 유독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 특히 여름철에는 더더욱. 관광객들이 물 밀듯 들어오니 일이 많잖아. 그러니 친구들을 언제 만나겠어? 그치, 밤에 만나야지. 그렇게 만나서 늦게까지 마시고 떠들고 놀다 보면 늦게 일어나게 된다고. 그럼, 매일 만나지. 그렇지 않아도 좀 있다가 친구들 만나러 나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에이, 제가 늙은 아저씨들하고 뭐하고 놀아요.”
“하긴. 그건 그렇고 말이야, 네 피부색은 원래 그런 거야, 아님 여행하면서 탄 거야?”
“여행하며 탔어요. 많이.”
“아 역시. 색 좀 봐, 부럽다 진짜.”
마리얀은 남들보다 유난히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오흐리드에서의 마지막 날은 다른 날보다 더 거센 비가 오후 내내 쏟아졌고, 비가 그치자 하늘을 집어 삼킬 듯 붉은 노을이 도시를 물들였다. 마리얀과 나는 마당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집 앞 골목길 위,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한 뼘 작은 서쪽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다 마리얀이 먼저 입을 뗐다.
“내년에 또 올 거야?”
“아마 못 올 거예요.”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글쎄, 한참 걸릴 거 같은데.”
“그때는 남편이랑 아이랑 같이 와. 꼭. 근데 말이야, 도대체 아이는 왜 안 낳는 거야? 응? 꼭 같이 오라고, 아이랑.”
“됐어요, 아저씨는 결혼도 안 해놓고 뭘. 장가나 가세요.”
껄껄껄 웃으며 마리얀은 아버지 때부터 매년 여름이면 찾아오는 스페인 가족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처음 왔을 때 총각이었던 남자는 어느 해부터 여자친구와 함께 찾아왔고 몇 년이 지나면서는 하나둘씩 늘어난 아이들과 함께 오고 있다고. 그러고 나서, 오래전 아주아주 오래전,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한 이야기, 결혼을 약속하고 식을 준비하다 헤어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붉었던 하늘은 코발트 빛으로 색을 바꾸더니 이내 속을 알 수 없는 그 본연의 어둠을 되찾았다. 그의 주름지고 깊은 눈은 하늘과 나 사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