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발칸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수없이 묻고 답해야 했던 질문 중 하나는 앞으로의 행선지와 지나온 여행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곧 가려는 낯선 곳에 대해 뭐 얻을 만한 정보가 있나 해서가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호스텔의 식탁이나 소파를 다른 여행자들과 나눠 써야 하는 처지에 서로가 멀뚱히 마주 보고 앉아 있기 영 멋쩍어 '예의 바른 배낭 여행자를 위한 지침서, 제7장. 호스텔에서 시간 죽이는 법'을 참고하여 궁금하지도 않은 남의 여정에 대해 묻게 되는 것이다. 다른 여행자에게서 얻은 정보를 덥석 받아 꿀꺽했다가 된통 체한 경험 이후 첫 번째 동기는 사라졌지만, 두 번째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어디 갔었니?” “좋았니?” “좋았구나!” “어디 갈거니?” “멋지구나!”의 레퍼토리를 적게는 하루에 한두 번, 많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야 했는데 덕분에 발칸을 여행하는 젊은 여행자들이 어떤 여행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학생이거나 사회 초년생인 그들 역시 우리나라의 청춘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정된 예산과 시간 안에서 가능한 많은 곳에 가고 가능한 많은 것을 보면서 가능한 많은 맥주를 마시는 것. 비슷한 나이, 비슷한 여행지, 비슷한 여행 목적을 가진 그들은 금세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었고, 그들의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한 발칸의 축복 담배를 줄줄이 피우며 거대한 페트병에 담긴 값 싼 맥주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새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나는 식당이나 거실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늙은 사람이었고 누군가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대답하기 곤란한 전업주부의 신분인데다 술도 마시지 않고 춤도 추지도 않으며 가고자 하는 장소도 보고자 하는 것도 그들과 달라 ‘어디 갔었니-좋았니-좋았구나-어디 갈거니-멋지구나’의 루틴이 끝나고 나면 더 할 말이라고는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샤워부스나 형편없는 조식에 대한 불평 따위가 전부였다. 그러다 이런 밑천마저도 떨어지면 다시 멀뚱히 마주 보고 앉아 있기 멋쩍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도미토리 침대에 누워 위층 침대의 바닥을 올려다 보고 있거나 피로한 다리를 끌고 하릴없이 밖으로 나가 또다시 거리를 배회하고는 했다. 여행 중반에 이르자 의무감 때문에 반복적으로 '대화'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 호스텔에서의 일상과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 자신, 그리고 영어로 듣고 말해야 하는 피곤함에 진력이 나서는 나도 모르게 말 없고 조용한 외톨이 여행자의 코스프레를 하게 되었다.
적어도 외부 세계에 알려진 코소보 프리즈렌의 호스텔은 단 한 곳이었다. 성격파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의수를 낀 정신 나간 남자가 스텝으로 있는 더럽고 불편한 곳이었으나, 팔월 휴가철의 호스텔은 여기저기서 온 여행자들로 거의 만실이었다. 그곳에 머문 이틀 동안 좋지 않았던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프리즈렌에 딱히 구경거리가 없어서였는지, 음식물 찌꺼기와 맥주 따위로 끈적끈적한 나무 테이블이 아무렇게 놓인 너절한 옥상의 테라스는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고, 나 또한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옥상에서 만난 토마스는 푸릇푸릇 밝으면서도 예의 바르고 점잖은 청년이었다. 얼마 전 8시 뉴스를 보면서 기상 캐스터의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지고 "머리가 너무 노란 거 아냐?" 라며 끌끌 혀를 차는 남편의 모습에 나의 남편이 드디어 꼰대가 되었음을 실감했는데, 예의와 점잖음을 논하는 나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우울한 일이다. 아무튼, 독일에서 온 토마스는 최대한 끌어 모을 수 있는 15일의 휴가로 발칸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친구들과 자유롭게 놀러 다닐 수 있었던 학창 시절과 달리 15 일로 못 박힌 여행 기간이 여전히 서운한 3년차 직장인인 그는 며칠 안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집이 있는 베를린까지의 상당한 이동 거리와 그 길에 놓인 수많은 여행지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상한 게 있잖아, 돈 없는 어린 시절에는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게 왜 그리 많았는지 몰라. 어떤 거? 그냥, 다 별 볼일 없는 것들이지 뭐. 티셔츠나 잠바나 가방이나 그런 것들. 다른 나라, 다른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독일에서는 본 적 없는 낯선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잖아. 그럼 갖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사고 그랬어.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말이야. 그래서 그때는 배낭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몰라. 그런데 말이지. 더 이상한 건 뭔지 알아? 지금은 돈이 있는데도 그때처럼 그렇게 갖고 싶은 게 없다는 거야."
안다, 이놈아. 토마스는 내가 요즘에서야 느끼는 것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애늙은이였다. 그렇다면 ‘이런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네.’ 라고 생각한 나는 정말로 늙은이?
새벽 2시까지 수다를 떨었음에도 다음날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에 중늙은이 토마스는 나처럼 십 분 일찍 나타났다. 그는 몬테네그로 국경을 넘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내가 간다는 코소보의 페야에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다고 했지만 지도를 보면 코소보 페야에서 몬테네그로 로자예까지 지방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즈렌에서 페야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페야 터미널의 매표소에 물어보니 다행히 로자예 행 버스가 있었다. 혹시 기차도 있나 싶어 버스터미널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기차역에 가봤지만 하루에 두 번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들어오는 기차가 전부였다. 나는 기차역 앞에 있는 페야 유일의 싸구려 호텔(호텔이 유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싸구려 호텔이 유일하다는 것이다)을 잡고 짐을 내려놓았다.
매주 토요일이면 페야 인근에 사는 농부들이 집에서 만든 치즈를 거대한 나무통에 담아 장에 들고 나온다고 했다. 이름 하여 '페야 토요 치즈 시장'. 치즈 시장을 구경하기 위해 코소보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즈 시장에 대한 나의 기대는 매우 컸다. 토요일에 맞춰 페야에 오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 시간을 맞춘 터였다. 아직 버스 시간이 남은 토마스와 함께 시장으로 향했다. 고맙게도 프리즈렌의 호스텔에서 만난 폴란드 여행자로부터 물려받은 페야의 도심 지도 덕분에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주말을 맞아 시장은 초입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상가들을 지나 시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채소와 과일을 파는 노천 시장이 나왔고, 킁킁거리며 쿰쿰한 냄새를 쫓다 보니 어느새 치즈 시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시장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거대하다는 나무통은 실은 거대하지 않았고 정확히 말하면 보잘것없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몇 개 없고, 대신 빨갛거나 파란 플라스틱 양동이가 대부분이었다. '시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작은 규모였기에 그냥 치즈를 파는 '구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듯 보였다. 토마스와는 그 썰렁한 치즈 구역에서 작별을 고했다.
비록 치즈 시장이 기대만큼 흥미롭지는 못했지만 페야 시장 그 자체는 놀랄 만큼 크고 활기에 넘쳤다. 페야 시장에서 구하지 못할 물건은 없을 듯 보였다. 하다 못해 '싸이'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까지 있었으니까. 물건 많고 손님 많은 시장에서 채소상, 지물포상, 환전상, 야바위꾼, 집시들이 한데 엉켜 장날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시장을 둘러보다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발칸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많은 수의 집시를 한꺼번에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글라마 연주자가 유난히 많다는 것이었다. 담벼락에 바글라마를 진열해 놓은 노천 가게에서, 하얀색 레이스가 나부끼는 포목점 앞에서, 땅바닥에 펼쳐 놓은 그릇들 사이에서,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현을 조율하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구슬프면서도 영롱한 음악을 배경으로 길거리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배를 까고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노란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흔들어대는 집시들을 보고 있자니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페야 외곽에 있는 페야 총주교 교회를 찾았다. 도시 이름 페야(Peja)는 영어 식 이름이고, 세르비아어로는 페취(Peć)이다. 지도를 물려준 폴란드 여행자가 교회로 가는 길을 현지인에게 물을 때 세르비아 식 이름으로 물어야 수월하다며 지도 한구석에 교회의 이름을 세르비아어로 그리듯 써 주었었다. ‘Pećka Patrijaršija’. 그리고 나는 그 옆에 한글로 이렇게 적었다. ‘패츠카 파트리야시야’. 세르비아 역사에 있어서 정신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크다는 세르비안 정교회 수도원인 패츠카 파트리야시야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자 세계 위험 유산에 올라 있다. 수도원과 그 주변 일대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알바니아계 무슬림의 공격으로부터 코소보 나토(NATO)군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여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세계 위험 유산에 오른 이유는 알바니아계 무슬림의 공격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과 풍파에 교회가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페야 도심을 벗어나 사십여 분을 걸어 교회의 첫 번째 초소에 도착했다. 그곳에 여권을 맡기면 경비병이 수도원 정문의 두 번째 초소에 전화를 걸어 '한국에서 온 개똥이 그리로 간다,' 라고 알리는 시스템이었다. 여권을 맡기고 첫 번째 초소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더러운 카펫이나 이불 따위를 길거리 한가운데 깔아놓고 누워 엉덩이를 긁으며 행인들에게 손을 뻗는 집시들이 우글우글한 시장통과 이곳까지 오는 길에 걸었던 쓰레기 나뒹구는 흙먼지 길이 몽땅 거짓으로 느껴질 만큼, 초소 안쪽은 싱그럽고 푸르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상쾌하고 평화로워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실개천을 따라 오 분쯤 걸어 수도원 입구이자 두 번째 초소에 닿았고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교회 안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앞 뜰의 나무들은 담장 밖의 그것들보다 더 푸르렀고, 소담하게 심어진 꽃들은 유난히 붉었으며, 하늘마저도 더 높고 더 파랬다. 겹겹이 높은 장막을 쌓아 어지러운 바깥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는 신비로운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이런 은둔의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검은 옷의 수녀님이 두 팔을 한가득 벌리며 내게 다가왔다.
"주님의 품에 들어 온 것을 환영합니다. 어디서 왔나요? 어느 나라 말이 편한가요? 도움이 필요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테니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요. 천천히 둘러보고 저기 보이는 서점으로 나를 찾아와요.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와 헤어진 후에도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할 수 없이 온화한 미소로 따뜻하게 나를 맞았던 그녀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 너무나 가슴이 벅찬 나머지 나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 내부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아름다웠다. 벽과 천장을 빼곡히 채운 프레스코화는 가늘게 새어 든 빛줄기에 금빛으로 빛나며 성인들의 얼굴에 광채를 더했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시간을 들여 꼼꼼히 교회 구석구석을 감상했다. 어느 하나 눈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내가 만약 신의 존재를 믿었다면, 그리고 진짜로 신이 있다면, 신은 그 순간 나와 함께 했으리라. 내 안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메워진 듯 충만한 기분이 되어 예배당 밖으로 나오니, 산에서 불어오는 청명한 바람에 실린 달콤한 꽃향기와 함께 따사로운 햇빛이 나를 맞았다. 이제 더 이상 치즈 시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모든 것을 감싼 그 평화로운 온기에 흡족해진 마음으로 교회 출구를 향해 걸었다. 그때 서점 안에 있던 수녀님이 황급히 밖으로 나와 나를 불렀다.
‘아. 서점에 들르라 하셨지.’
나는 그녀가 있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은 여느 관광지에 있는 기념품 가게처럼 꾸며져 있었다. 성인들의 얼굴이 새겨진 열쇠고리, 동글동글한 나무 구슬의 십자가 목걸이, 반지, 팔찌, 그리고 수도원에서 만들었다는 과일 잼, 와인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손님을 상대하다가 창문을 통해 나를 발견했던 것인지 수녀님은 계산대 안쪽에 서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고, 기념품을 산 손님과의 볼일이 끝나자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게 영어로 인쇄된 수도원 브로셔와 작은 종이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입장료 내고 가야죠! 2유로!”
흠...
비통한 기분이 되어 초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교회로 오던 길에 만난 개울 너머의 소들이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나를 보고 소가 말했다.
"멍청아."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더 멀고, 더 뜨겁고, 더 먼지 날려 죽을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