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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Apr 22. 2016

[4] 웃으니 즐겁다_불가리아 소피아.

1부-발칸


여행을 준비하며 정보를 찾을 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여행지는 그곳에 가 본 사람이 많지 않으니 당연하지만, 파리나 도쿄처럼 인기가 많은 여행지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대한 양 때문에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이 있다. 불가리아는 좋은 경우였다. 소피아에 살면서 현지의 소식과 정보를 거의 독보적으로 전하는 블로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좁쌀만한 글씨의 영문판 론리플래닛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통역 일을 하며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현지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는 그 블로거에 대한 신뢰가 더해져, 호스텔 예약 사이트에 달린 불길하고 미심쩍은 후기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추천한 호스텔로 이메일을 보내 침대 하나를 예약했다. 


지옥 행 버스가 있다면 분명 이렇지 싶은 스코페 발 소피아 행 버스를 타고, 인간이 버스라는 것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맛본 후, 혼이 쏙 빠진 채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을 서로 자기 차에 태우겠다고 앞다퉈 뻗어대는 택시 기사의 마수를 가까스로 뿌리친 다음, 오줌 냄새 진동하고 쓰레기 나뒹구는 어두운 골목을 몇 바퀴 헤매고 나서야 호스텔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입구를 찾아 건물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소리가 났다.


“이쪽!”


뒷걸음질 치며 위를 올려다보니 작은 머리통 하나가 보였다. 삐이익~ 버저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고 계단 저 위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4층으로 올라오세요.”


지친 몸으로 기다시피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나를 난간에 서서 내내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내가 막 4층에 도착하자 문간에 놓여있는 책상으로 잽싸게 돌아가 앉으며 나를 맞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개구리같이 뽈록 튀어나온 배만 보면 중년으로 보였으나 그 배를 팽팽하게 감싸고 있는 티셔츠의 그림은 초등학생의 그것이었다.


“환영합니다. 크로스 포인트 호스텔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희영님이 예약하신 8인 혼성 기숙사 방은 지금 계시는 4층에 있으며 4층에는 욕실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욕실을 사용하고 있다면 3층의 욕실을 쓰셔도 됩니다. 부엌은 저쪽, 맞은편에 보이는 곳으로 저희는 아침 식사는 제공해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고객 여러분들이 스스로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호스텔은…”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처음에 깍지 껴진 채 볼록한 배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던 그의 손은 안경을 추켜올리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쓸어 넘긴 후 허공을 멋지게 한 번 휘저은 다음 원래 있던 배 위로 안착했는데 그것도 잠시, 그의 손은 다시 안경에서 머리에서 허공에서 춤을 추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어지러운 안경 너머의 두 눈만은 한치의 미동도 없이 내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말투와 몸짓은 영락없이 엄마 화장대에 몰래 앉아 엄마의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어른 흉내를 내는 일곱 살 여자아이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런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 피곤해서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나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는지 '투숙객 체크인 시 직원의 업무 수행 지침'의 모든 항목을 빼놓지 않고 실행하려는 듯 보였다. 배낭을 내리지도 못하고 그의 책상 앞에 서 있던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기, 그건 그렇고...”


그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흔들며 내 말을 막았다.


“총 이틀 예약하셨으며 40레바입니다. 지금 부탁 드립니다.”


버스터미널 환전소의 환율이 좋지 않아 택시 값으로 5유로만 환전했기 때문에 내겐 불가리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유로를 가지고 있으시다면 저희는 유로도 받습니다.”


수중에 딱 50유로가 있었다. 두 번 고이 접어 배낭 깊숙이 잘 넣어 둔 비상금이었다. 내가 물었다.


“내일 아침에 계산하면 안 되나요?”

“밖에 나가면 ATM이 많이 있습니다. 나가서 돈을 찾아다 주십시오.”


새벽 한 시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는 집요했다.


“내일 아침 근무자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 정산이 맞아야 합니다. 지금 돈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말투, 표정, 몸짓, 그리고 망할 놈의 그 유치한 티셔츠까지 그의 모든 것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책상 위에 있던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그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분노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배낭, 배낭 안 주머니, 그 주머니 안 또 다른 주머니, 그 주머니 안 종이봉투 속에 들어있던 비상금 50유로를 꺼내 꽝 소리를 내며 책상에 놓았다. 50유로짜리 지폐를 보고 그가 물었다.


“40레바는 20유로입니다. 20유로 없으십니까?”

“없어요!!”

“여기는 불가리아입니다. 불가리아 화폐는 레바입니다. 불가리아에서는 레바로 계산하셔야 합니다.”


미친년들이 왜 팔짝 뛰는지 201x년 8월 12일 오밤중 소피아에서 알게 되었다.


호스텔의 모든 것은 낡아 빠져 갖가지 소리를 냈다.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종잇장처럼 얇은 매트리스가 천장을 울릴 듯 쇳소리를 냈고, 발뒤꿈치를 들고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마룻바닥이 삐걱댔으며, 갖은 노력을 다해 조심스레 열어도 문은 매번 손톱으로 칠판을 긁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이른 아침 화장실에 가려고 그렇게 요란을 떨며 방을 빠져나와 복도에 나오니 웬 젊은 여자가 부엌과 복도 사이를 서성이다 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빤히 쳐다보았다. 다들 자고 있는 시간이라 속삭이듯 그녀에게 “굿 모닝,”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눈을 부라리며 그녀가 하는 말,


“What??”


아침 근무자였다. 이쯤 되면 호스텔 사장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작자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호스텔은 정말이지 엉망이었다. 밤 근무자가 말한 '고객이 직접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드리지요.'의 공용 주방에는 새까만 먼지가 겹겹이 눌어붙은 토스터와 커피 기계가 고장 난 채 방치되어 있었고, 아무런 조리 도구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차 한 잔 마실 물조차 끓일 수도 없었다. 식탁 위에는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으며 냉장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자란 의자는 모두 망가진 것들이어서 다리 하나가 부러져 있거나 솜이 터져 밖으로 나와 있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한 번은 밖에 나갔다가 방에 돌아와 보니 아침 근무자 여자가 아무도 없는 방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말도 없이 방을 나간 적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침대를 정리하며 침대보를 새 것으로 갈지 않았다. 고물상에서 주워왔나 싶을 정도로 더럽고 낡은 가구와 밤낮으로 현관 앞 책상에 앉아 죽을상을 하고 있는 암울한 표정의 두 남녀 탓에, 호스텔은 마치 냉전 시대 동독의 어느 울적한 시골 산자락에 자리한, 모두로부터 잊혀진 정신병자 수용소 같았다. 바깥세상은 어쨌거나 신기하고 낯선 것들로 가득하니 실컷 놀고 들어와 깨끗하고 편한 숙소에서 잠을 잘 수 있다면 여행 와서 입 댓 발 내밀 일은 별로 많지 않다는 생각인데, 소피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침 먹거리를 사기 위해 잠옷 차림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죽은 듯 적막한 호스텔과 호스텔이 면하고 있는 한산한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들어서자, 순간 살아있는 모든 빛과 소리와 냄새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맑고 시린 아침 햇살을 부수며 바삐 걷고 있는 사람들, 경적을 울리며 그들 사이를 아슬아슬 스쳐 지나가는 트램, 문이 활짝 열린 작은 카페에서 풍겨 나오는 커피 냄새, 계피 냄새, 그 앞에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중년 여자가 뿜어대는 담배 연기, 그리고 그 담배 연기를 부수는 맑고 시린 아침 햇살. 쥐어짜는 내 숨소리와 희뿌연 바닥 타일뿐인 수영장 물 속에서 머리를 힘껏 들어 올려 ‘푸하!’ 물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부산한 도시는 며칠째 동면하고 있던 내 감각들을 순식간에 흔들어 깨웠다. 그 기분 좋은 간지럼을 느끼며 거리 한복판에 서서 나는 실실 대며 한참을 웃었다. 머리는 뻗쳐서리 잠옷을 걸치고 미친년처럼. 


거리를 오가는 단정하고 말쑥한 현지인들의 복장에 흠칫 놀란 나는 여전히 한밤중인 호스텔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머리에 빗질을 하고 가지고 있던 옷 중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예쁜 모습으로(그래 봤자 더러운 등산화, 색 바랜 구멍 난 배낭, 그리고 그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무늬 원피스 차림이었지만) 이제 막 내 앞에 놓인 낯선 도시 안으로 들어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소피아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85%가 정교회를 믿는 불가리아는 500년 가까이 오토만의 지배를 받았다. 하여 소피아 교회들의 역사는 이러했다.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교회, 모스크에서 용도 변경된 교회, 모스크를 의식해 일부러 보잘것없이 지은 교회. 오토만을 쫓아낸 기념으로 보란 듯이 크게 지은 교회, 등등. 호스텔에서 가까운 그라프이그나티에브 거리에 16세기에 지어진 '블랙 모스크'를 용도 변경한 교회가 있고 그 담벼락을 따라 채소 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채소 시장이나 생선 시장이라고 하면 보통 아침 일찍 문을 열 것 같지만 발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전 열 시는 넘어야 상인들이 하나 둘 장사 준비를 시작했고 그들보다 부지런한 관광객인 나는 이제 막 좌판을 펼치고 있는 상인에게 플라스틱 컵에 담긴 산딸기를 겨우 살 수 있었다. 


집을 떠나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남편과 나는 소피아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여행을 열흘 정도 남겨둔 시점에 남편이 들어오면 함께 불가리아를 여행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처음 계획이었다. 마케도니아와 코소보에서 예상했던 것 보다 짧은 시간을 보낸 탓에 불가리아에 일찍 도착했고 우리는 계획을 바꿔 루마니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편은 어디든 좋다고 대답했다. 날짜와 장소에 대한 배분은 여행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발칸을 여행하는 다른 여행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던 나는 덕분에 그동안 그 배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불가리아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부재의 존재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매번 더 크게 느껴지고는 한다. 남편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도착하는 것은 8월 26일 밤이고 나는 그보다 하루 일찍 들어가 루마니아 여행 정보를 모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불가리아에서 내가 가진 시간은 딱 2주. 내내 들고 다니던 작은 수첩에 얼마 남지 않은 여백을 펼쳐 날짜 배분을 시작했다.


서울3 - 대전2 - 경주2 - 대구2 – 부산3-...


도움이 필요했다. 소피아에 두 군데의 여행자 센터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소피아 대학 근처의 '소피아 여행자 센터'이고 다른 하나는 무료 워킹 투어가 시작되는 법원 건물 근처의 '국립 불가리아 여행자 센터'가 그것이었다. 나는 국립 여행자 센터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자세한 불가리아 전도와 대표 관광 도시들의 지도, 도시 간 이동 방법 등에 대해 대략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었는데 ‘공부’해야 할 많은 양의 자료와 한정된 시간 앞에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나의 조급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센터에서 받은 소피아 시내 지도를 보며 오늘의 동선을 짰다. 그리고 센터까지 오는 길에 구경했던 관광지 아이콘에 야무지게 X자를 그었다. 9일짜리 직장인 관광객 모드로 변신한 나의 모습에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비장한 각오로 지도의 아이콘들을 찾아 열심히 걸었다. 


옛 공산당 본부가 멀리 보이는 대로변에 지하철 세르디카역이 있었다. 세르디카는 소피아의 옛 이름으로 고대부터 불려진 이 이름은 기원전 5세기경 이곳에 정착한 켈트 족 중 하나인 Serdi족에서 유래했는데 14세기에 처음으로 불려진 Sofia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점점 인기를 얻어 세르디카를 대신하게 되었다. 지하철 역의 모습은 우리의 것과 비슷했지만 지하보도를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가자 지붕 없는 열린 공간이 나타났고 14세기 후반 오토만 지배기에 낮게, 작게, 눈에 뜨지 않게 지어졌다는 '성 페트카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교회 뒤에는 고대 세르디카의 유적지가 노출되어 있었는데 유적을 피해 머리 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도로는 유적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만나고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 차량 통행이 많은 곳이었다. 이것을 보고 소피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나왔던 발칸의 도시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소피아의 도시다운 모습에 문명으로 들어온 기분마저 들었다. 세르디카 역 지하보도를 건너니 소피아 유일의 모스크라는 '반야 바쉬(Banya Bashi)' 모스크가 나왔다. 16세기에 지어진 이 모스크의 이름은 ‘많은 욕조의 물’이라는 뜻으로, 모스크가 있는 구역이 천연 광천수로 유명한 소피아에서도 수원이 몰려 있는 곳이라 했다. 모스크 옆 공원 한 편에는 '소피아 중앙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 대중목욕탕으로 이용되다가 낙후된 건물과 지붕 붕괴의 위험 때문에 문을 닫은 후 근래 들어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를 마치면 소피아 박물관과 치유 센터로 쓰일 예정이라고 했다. 오토만(투르크)과 러시아는 흑해와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여섯 차례 전쟁을 치렀는데, 여섯 번째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자 비로소 불가리아는 오토만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불가리아에서 오토만을 쫓아낸 러시아에 의해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새워진, 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러시안 교회'는 공사 중이었지만 그 헤게모니 판 한가운데에서 발칸의 나라들이 어떤 질곡의 세월을 보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곳을 지나 소피아의 상징과도 같은 '알렉산더 네브스키 교회'로 향했다. 교회로 이어지는 작은 공원에는 노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퇴역 군인의 분위기를 풍기는 나이 든 남자들이 녹슨 라이터, 푸른색의 유리잔, 총알, 성화, 묵주 등을 좌판에 펼쳐 놓고 팔고 있었고 그 한편으로 마그넷이나 스노우글로브 같은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한여름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그 누구도 열심이지 않았다. 공원을 지나자마자 길 끝에 거대하게 솟은 옅은 민트색 지붕의 교회에 눈에 들어왔다. 그 크기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하여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몸집이 우람한 교회를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숨진 20만 러시아 군인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데, 각종 열쇠고리, 엽서, 사진 액자 등에 등장하는 유명한 곳인 만큼 대형 관광버스들이 쉴 새 없이 들고 났다. 나는 목이 부러져라 교회를 구경한 후 근처 공원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다리가 아플 때마다 혹은 더위에 지칠 때마다 가까운 곳에 푸른 공원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관광객답게 화려한 외관의 왕궁, 대통령 궁, 국립미술관, 민속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도시 별 날짜를 배분한 날이라 의욕에 넘쳐 사기를 불태우며 소피아 관광에 임했다. 주요 볼거리를 둘러본 후 보행자 전용로인 비토샤 거리를 걸었다. 여느 도시의 보행자 거리와 마찬가지로 카페, 레스토랑, 아이스크림 가게,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 기념품 가게들이 반복적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어느새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여행자로서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는 충만감이 밀려왔다. 기쁜 마음으로 거리를 걷다 발견한 작은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식당은 터키의 메제 식당처럼 미리 조리된 진열 음식 중 원하는 것을 골라 담는 곳으로 안을 들여다볼 때마다 현지인들로 붐비던 곳이었다. 나는 수많은 음식 중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신중히 골라 주문했다. 그러다 보니 가짓수가 꽤 많아졌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현지들은 보통 수프 하나에 빵 한 조각, 혹은 밥 하나에 반찬 하나 정도가 담긴 쟁반을 앞에 두고 있었다. 내가 너무 많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아닌지 주인 여자에게 물으니 식탁에 앉아 이미 자기 몫의 음식을 거진 해치우고 바닥이 드러난 수프 그릇을 핥고 있던 한 남자가 거들고 나섰다. 스페인에서 여행 왔다는 그가 여행자 센터에 관광객을 위한 맛집이 아닌 현지인들의 맛집을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추천 받은 곳이 이곳이라며 손가락으로 진열장 안을 가리키며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고 또 저것도 맛있으니 다 먹어 보라고 나를 독려했다. 그의 말대로 음식은 정말이지 모조리 다 맛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여행했던 나라들의 지나치게 단순한 혹은 너무나 패스트푸드적인 음식들과 비교되어 그 맛은 더 극한의 것이 되었다. 나는 할당된 날짜에 쫓기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이 식당 때문에, 나를 환장하게 만들었던 다시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던 호스텔의 밤 근무자 남자에게 이렇게 물어야 했다. 


“저기... 있잖아... 나... 여기서 하루 더 묵어도 돼? ☞☜”

<왼쪽은 가게의 젊은 사장, 엄마와 기타 할머니들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데 다른 분들은 영어를 못하지만 젊은 사장에게 음식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가짓수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알려 주었다. 저녁 때 보다 점심에 가야 음식이 더 많고 오전 11시 반 정도에 모든 음식이 준비된다고 했다. 가게 안, 배부르고 행복한 표정의 남자를 보시라. 그 스페인 여행객>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진 배로 나 역시 행복했다.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웬만하면 우울한 호스텔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배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몸져누워야 했다. 누우면 소가 된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지만 그런 어머니가 낳은 나는 누워야 소화가 된다. 이상한 일이다. 한참을 누워 소화를 시키고 나서 옆 방에서 묵고 있던 준꼬와 함께 밤 산책을 나섰다. 


바깥활동 없이 맨날 집에만 있는 내가 여행을 통해 받는 외부 자극이란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인상일 것이다. 준꼬는 유월에 태어나 준꼬가 되었다고 했다. 요즘은 일본에서도 많이 쓰지 않는 구식 이름이라며 한국에서 내 이름 글자인 '영' 또한 그렇지 않냐고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이웃 나라 국민답게 게다가 수많은 저가항공이 오가는 오사카 시민답게 그녀는 서울에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는데 그녀의 방문 목적은 언제나 돼지고기 먹기와 쇼핑이었다. 그녀는 인도 자이푸르의 한 의류 공장에서 인도인 근로자들의 감독관으로 일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무슨 일이든 핑계만 대는’ 인도인들에게 질려 일 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에 나선 참이었다. 인도에서 사용했던 살림살이와 일 년 간 사 모은 백여 벌의 옷을 일본으로 보내 놓고 여행 가방만 챙겨 그녀가 처음 도착한 곳이 이스탄불이었다. 그곳에서 한가한 일주일을 보냈더니 이내 심심해졌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그녀의 사랑 돼지고기가 없었다. 터키의 이웃에 요구르트로 유명한 불가리아가 있다는 것이 생각나 그것을 먹겠다는 목표 하나로 소피아에 오게 되었는데, 막상 소피아에 오니 요구르트뿐만 아니라 무려 돼지고기까지 있어서, 게다가 둘 다 엄청나게 맛있어서 그녀는 행복해 했다. 우리는 비토샤 거리의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에 앉아 그날의 마지막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밤공기는 쾌적했고 거리는 한산했으며 아이스크림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우리는 이 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사진을 찍기로 하고 옆 테이블에서 아이스크림 컵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남자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우리의 부탁을 받아 정성을 다해 사진을 찍어 준 남자가 우리에게 카메라를 돌려 주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고는 자기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그 얘기를 듣고 준꼬가 속삭이듯 내게 물었다.


“근데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종종 TV 뉴스에 나오던데, 그게 도대체 어디야? 나라 이름이야?” 


팔레스타인도, 코소보도, 마케도니아도 모르는 준꼬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매 순간이 즐겁고 신나며 기쁨에 넘쳐 보였다. 시원한 저녁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며,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밀어 넣으며, 예쁜 포장의 요구르트 병을 집어들며 그녀는 매번 즐거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를 보고 무엇을 얼마만큼 아느냐는 여행의 즐거움과 아무 상관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준꼬와 함께 오전 내내 거리를 걷고는 그녀를 어제의 그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나보다 더 많은 양의 음식으로 쟁반을 채웠다. 현지인들이 계산할 때 보니 보통 3~4레바 정도 내던데, 고기를 먹지 않는 나는 9레바, 고기 요리를 잔뜩 담은 준꼬는 무려 14레바나 나왔다. "이따다끼마스~"로 시작된 우리의 식사는 수 차례의 "오이시이~"를 거쳐 "고치소우사마데시타!"로 마무리 되었다. 맛있는 점심 덕분에 매우 행복하다는 그녀는 디저트를 먹으러 간 카페의 예쁜 마당과 불가리아의 자랑 장미로 치장된 화장실(엉덩이 닦는 화장지조차 분홍색에 장미향이 났다)에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고, 할일 없이 트램을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면서도 행복의 만세를 외쳤다. 그녀는 불편해 보이는 신발을 신고도 참으로 잘 걸었으며 그라프이그나티에브 거리에 오후면 서는 중고책 시장에서 일본 책을 발견하고는 다시 한번 반가움의 환호를 외쳤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소피아 시민들의 퇴근 시간이었다. 


우리는 소피아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해 점심 먹은 것을 꺼트리느라 더 열심히 거리를 걸었다. 소피아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되는대로 걸으며 준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 놓았다. 남자친구 이야기, 전 남자친구 이야기, 남자친구와 전 남자친구 사이의 남자 이야기, 인도 이야기, 부모 이야기, 지난 여행 이야기. 어제 처음 만난 나에게 어떻게 이런 사적인 이야기까지 할 수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저 숨김 없고 밝은 여성이었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회색으로 물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것이 꽤 아름다워 보였다. 


드디어 점심 먹은 배가 꺼졌고 우리는 관광지에서 한 걸음 물러난 조용한 주택가 골목 현지인들에게 소문난 집이라는 식당에 들어가 신중히 주문했다. 물론 돼지고기 요리도 포함해서. 비록 음식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화려한 색상과 예쁜 무늬의 전통 그릇에 보기 좋게 담긴 음식은 놀랄 만큼 맛있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 음식 그 자체가 마치 소피아 같았다. 소피아뿐만 아니라 불가리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꼬의 지나치게 밝은 기운에 안절부절못했던 나는 어느샌가 그녀처럼 크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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