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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Nov 12. 2015

[3] 마트카계곡_마케도니아 스코페.

1부-발칸

60번 시내버스를 탔다. 도심을 동그랗게 에워싼 다메그루에브 거리를 가운데 두고 스코페는 동서로 흐르는 바다르 강을 따라 좌우로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도심의 동쪽 끝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스코페의 서쪽 지역을 가로질러 도시의 남서쪽 마트카 계곡이 종점이었다. 버스가 조밀한 중심부를 벗어나는데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도심 밖 거주 구역을 통과하는 데는 삼십 분 이상이 걸렸다. 저층의 아파트, 천막 지붕 아래 상설 노천 시장, 가구 가게, 공구 가게, 도시 외곽의 커다란 쇼핑몰 등 차창 밖 도시의 풍경처럼 버스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장 본 채소들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 손수레를 끌어올리며 버스에 올라 탄 아주머니가 손에 쥔 버스표를 기계에 밀어 넣으며 날렵한 눈 놀림으로 버스의 빈 좌석을 샅샅이 훑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니 버스정류장의 플라스틱 지붕 아래 벤치에 품이 헐렁한 치마를 입은 비슷한 아주머니들이 비슷한 장바구니를 다리 사이에 끼고 서로의 엉덩이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쥔 할아버지를 부축해 버스에 오른 풍성한 곱슬머리의 예쁜 아가씨를 보고 늦은 밤 골목에서 우연히 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울퉁불퉁 털북숭이의 남자가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청바지를 엉덩이까지 끌어내리고 유행이 한참 지난 징 박힌 흰색 벨트를 똑같이 허리춤에 두른 세 젊은이가 거들먹거리는 몸짓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역시나 맞춘 듯 서로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통통한 몸집의 소녀들이 그 젊은이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수근수근 귓속말을 하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의 낯익은 것들과의 조우는 미지의 목적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잊을 만하면 느닷없이 거짓으로 밝혀져 선택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는 여행 정보에 대한 불안감을 잠시 잊게 했다. 


도시를 완전히 빠져나간 버스가 시골길로 접어 들었다. 도로의 폭이 좁아졌고 창 밖의 풍경 또한 달라졌다. 버스는 꽁무니에 빈 수레를 매달고 느릿느릿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는 트랙터 뒤를 바짝 쫓다가 그것을 추월해 그동안 내지 못했던 속도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자를 눌러 쓴 늙은 남자가 모는 마차에 가로막혀 다시 속도를 줄였다. 버스 정류장 간의 거리가 점점 넓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내리고 나자 버스 안에는 한 눈에 보아도 외국인임이 분명한 관광객들만 남게 되었다. 휑한 버스 안을 둘러보다 서로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멋쩍게 눈썹을 치켜올리는 인사로 알게 모르게 동지애를 확인한 우리들을 태우고 버스는 계곡을 향해 깊숙이 들어갔다. 


마트카는 알바니아의 코만 호수처럼 댐이 생기면서 호수가 된 곳이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물길을 따라 십오 분쯤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으니 작은 댐이 나타났다. 댐이 만든 길쭉한 모양의 호수와 그것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돌산의 생김까지 코만 호수와 쏙 닮은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코만 호수에 비해 크기가 많이 작다는 것이었다. 많이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런 조각상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스코페 도심을 벗어나 자연 속에 오롯이 들어와 있음에 기분만은 가벼웠다. 


마트카를 즐기는 방법은 모터보트를 타고 계곡을 한 바퀴 둘러보거나, 카약을 빌려 노를 젓거나, 산책길을 따라 걷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다른 여행자 몇 명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기로 했다. 물 좋고 산세 좋은 곳이면 어디나 그렇듯 유원지 마트카 계곡에도 레스토랑과 카페, 배를 빌려주는 가게가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뱃놀이를 하겠다고 하자 상인이 한 사람당 400데나르라고 가격을 제시했다. 스코페의 호스텔에서 미리 알고 간 가격은 300데나르였기에 그렇지 않냐고 내가 물으니, 상인은 우리가 어느 호스텔에 묵고 있는지, 다 함께 그 호스텔에 묵고 있는지 물었다. 이제 막 급조된 우리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그렇다고 대답했고 상인은 잠깐 죽는 시늉을 하고는 싱겁게도 금세 환한 얼굴이 되어 “그럼 뭐 그럽시다,” 라고 대답했다. 사실 우리가 어느 호스텔에 묵는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 흔히 그러듯 400데나르에 흔쾌히 “좋아요,” 라고 했다면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일 것이고 아니면 그만일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 배의 선장이 된 상인은 배가 선착장을 떠나 아름답고 푸른 물길을 달리는 내내 우리를 즐겁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뱃놀이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달달거리는 모터 소리와 이따금씩 계곡 사이를 푸드득거리며 날아가는 새 소리, 그리고 우리에게서 나오는 작은 감탄사만이 전부였다. 트로트도 뽕짝도 없었다. 그렇게 이십 여분을 달린 우리는 기슭에 배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 산 중턱에 있는 동굴로 향했다. 동굴 입구에 닿자 선장이 동굴 입구 한편에 숨겨 놓은 소형 발전기를 돌려 동굴의 조명을 켰는데 발전기의 크기처럼 동굴은 대단치 않았다. 


여행 안내서나 다른 여행자들이 찍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고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많은 상상을 한다. 대개 그 사진들은 굉장히 근사해서 회사에 앉아 있는 것이 몹시 괴롭고 지금 당장 그 사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의 신세가 한탄스럽다. 하지만 해외 직구를 통해 구입한 물건을 지루한 기다림 끝에 받았는데 막상 그 물건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만큼 멋지지 않거나 몸에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여행에서도 그런 일이 빈번하다. 그럴 때면 그저 내가 그토록 바랐던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신세를 한탄했던 그 처지에서 벗어나 원했던 곳을 둘러보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돈이 아깝네, 갈 필요가 없네 라는 식으로 불평을 토로해 보았자 입만 댓 발 나올 뿐 여행지에서의 소중한 하루를 보내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뱃놀이는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는 암암히 솟은 바위산들이 머리 위에 솟아 있는 태양에 거뭇거뭇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선착장 근처의 카페에 들러 막대한 돈을 내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신 다음 물길을 따라 절벽의 허리춤에 난 산책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본 계곡의 모습은 배를 타며 보았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물과 나무의 푸름은 더 푸르렀고 공기는 한층 더 싱그러웠다. 좁은 오솔길을 걷다 모퉁이를 돌면 느닷없이 옥빛의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옆에 두고 나무 뿌리가 만든 계단에 집중해 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 속 한가운데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적막하고 고요한 평화는 이따금씩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깨지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나의 심장은 전보다 조금 더 빨리 뛰었다. 마트카는 희귀 동식물의 보고라 했다.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고유 품종의 나비들이 있고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의 20%가 유일하게 마트카에서만 발견된다고 하니, 미처 이름도 갖지 못한 동물이 수풀 사이에서 폴짝 뛰어나와 난생처음 보는 우스운 얼굴을 내 코 앞에 들이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내 심장은 점점 더 거칠게 뛰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인사를 건네는 내게 서둘러 이렇게 말했다.


“너 혼자야? 저 앞에 뱀이 있어, 미친 놈의 뱀이 세상에 점프를 하면서 우리한테 막 달려 들었어. 물리면 죽는 독사야 독사. 내 동생이 한 마리 죽여서 호수에 던졌는데 더 있을지도 몰라. 내가 너라면 더 이상 가지 않겠어. 물론 너의 선택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보니 일행 중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드름쟁이 남자아이의 손에 급조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기다란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러시아 억양에 하이힐을 신고 있던 중년의 그녀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뱀의 생김새에 대해 손을 휘저으며 설명하고는 “up to you!” 라는 말을 남겨 놓고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아쉽지만 산책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독사와 혈투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는 독사야 독사. 내 동생이 한 마리 죽여서 호수에 던졌는데 더 있을지도 몰라. 내가 너라면 더 이상 가지 않겠어. 물론 너의 선택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행 중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드름쟁이 남자아이의 손에 급조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기다란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러시아 억양에 하이힐을 신고 있던 중년의 그녀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뱀의 생김새에 대해 손을 휘저으며 설명하고는 ‘up to you’라는 말을 남겨 놓고 쫓기듯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아쉽지만 산책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독사와 혈투를 벌일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더 있었기에 댐 아래쪽으로 내려가 산책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물가 여기저기에서 고기나 옥수수를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이곳과 닮은 소요산 계곡으로 물놀이를 간 적이 있다. 아래 위 색이 다른 짝짝이 수영복에 꽃잎이 한가득 달린 수영모자를 쓰고 분홍색 튜브를 몸에 끼고 물놀이를 하다가, 아빠가 주워 온 얇고 검은 돌판에 올려 놓은 고기가 지글지글 익으면, 그 냄새를 맡고 물에서 나와, 엄마가 기름이 가득 베인 나무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는 고기를 아기 새처럼 입을 쩌-억 벌리고 받아 먹고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바삐 다리를 버둥대며 둥둥 물에 떠서는, 돌판에서 튀는 기름에 몸을 피하는 엄마와 연기에 눈을 잔뜩 찌푸린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 여름의 기억을 떠올리며 맑은 냇물에 손을 씻었다. 저 옆에서 해먹에 누워 몸을 흔들던 남자와 그 남자 옆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던 노인이 나를 불렀다. 젖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그들에게 다가가니 노인이 냇물에 담가 놓았던 복숭아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웃으며 사양했지만 노인은 나보다 더 크게 웃으며 복숭아를 내 손에 안겨 주었다. 차갑고 커다란 복숭아 한 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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