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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May 08. 2016

[5] 감상의 순화 혹은 왜곡_불가리아 싸바레바 반야.

1부-발칸

자신의 여정에 대해 서양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웠어.” 

“환상적이었어.” 

“끝내줬어.” 

“굉장했어.” 

“진짜 멋졌어.” 


반면 나는,

“가는 길에 엄청 고생했어."

"성채는 힘들게 올라간 보람이 없었지 뭐야."

"교회는 정말 관리가 엉망이더라. 아깝게스리."

"아! 버스는 이번에도 역시나 였지!”


이런 나의 말을 듣고 있는 서양인들은 어쩐지 꽤나 불편해 보였다. 하여 나중에는 나 역시 찬양조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그들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좋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대체로 칭찬 일색인 그들의 감상과,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 하였는데도 좌불안석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추리해 보았다. 


그들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and/or

그들은 억수로 운이 좋았다.

and/or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서양의 매너이다.


알바니아 지로카스트라에서 만난 폴란드인 아시아만이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있지, 릴라 수도원은 불가리아 최고의 볼거리잖아. 불가리아 여행 온 사람 중에 거기 가지 않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도 소피아와 수도원을 오가는 버스가 하루에 달랑 한 대 있다는 거야. 처음에는 설마 몇 대 더 있겠지 라고 생각해서 수도원을 다 둘러본 다음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도 혼자 여행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화장실에라도 간 사이에 버스가 들어올까 봐 버스정류장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말이야. 나중에는 정말 오줌이 마려워 죽겠는데도 화장실에 갈 수가 없는 거야. 그렇게 몇 시간이나 기다렸게? 장장 네 시간! 내가 탄 버스가 뭐였는지 알아? 바로 하루에 달랑 한 대 있다는 그 버스였다고! 나원참. 발칸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고 그중에서도 불가리아는 특히 아름답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정말 발칸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에 신물이 나. 특히나 혼자서!!”


'릴라'산은 그 유명한 '릴라 수도원'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 중 하나라는 '일곱 개의 릴라 호수'도 가지고 있다. 싸빠레바 반야(Sapareva Banya)는 그 '일곱 개의 릴라 호수'로 가는 관문이자 유럽에서 가장 뜨거운 광천수와 발칸 반도 유일의 간헐천이 있는 온천 마을로 유명하다. 릴라 수도원에만 간다면 싸빠레바 반야에 묵을 이유가 없지만 나는 릴라 호수를 보러 산에 오를 생각이었기에 때문에 싸빠레바 반야에 숙소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피아 여행자 센터'나 인터넷에서 그곳의 숙소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구글에서 '싸빠레바 반야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의 검색어로 찾은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소피아를 출발했다. 


소피아 중앙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두 시간 만에 중간 도시인 두쁘니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두쁘니짜는 릴라 호수와 릴라 수도원 중간에 있는 소도시로 교통은 편리하지만 도시 그 자체는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잿빛이었다. 두쁘니짜 버스터미널만이 그런 도시에서 유일하게 활기를 띠는 곳 같았다. 나는 소피아에서 싸빠레바 반야에 가기 위해, 싸빠레바 반야에서 릴라 수도원에 가기 위해, 릴라 수도원에서 다시 싸빠레바 반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빠레바 반야를 나와 멜닉으로 가기 위해 터미널에 들렀다. 그때마다 버스를 기다리며 짧지 않은 시간을 터미널에서 보내야 했는데 터미널에서 이런저런 잡무를 보는 한 아저씨가 매번 어디선가 나타나 내게 아는 체를 했다. 


“어디 가니?” 

“다음 버스는 몇 시에 있단다.” 

“또 왔네!” 

“이번엔 어디 가려고?” 

“잘 갔다 왔니?” 

“저 버스 타렴.” 

“어이쿠, 또 왔네!”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조합해 반갑게 맞아 주고 타야 할 버스를 잊지 않고 알려 주었던 그 아저씨 덕분에 잿빛의 두쁘니짜는 장난감 백화점을 연상시키는 터미널의 외관처럼 화사하고 설레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두쁘니짜 터미널 아저씨의 사진은, 놀라 자빠질 정도로 경이로운 수도원과 목구멍이 메일만큼 아름다웠던 호수를 구경한 다음, 도시를 떠나는 마지막 날 이른 아침에 찍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다시 불가리아를 찾았을 때 인화한 사진을 소피아 우체국에서 우편으로 보냈다. 받는 사람 주소는 '두쁘니짜 터미널, 인포메이션 데스크 앞'>  


두쁘니짜에서 싸빠레바 반야까지 버스로 삼십여 분이 걸렸다. 매캐한 두쁘니짜의 도심을 뱅뱅 돌던 버스가 드디어 도시를 벗어나자 차창 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높은 릴라 산이 오른편에 우뚝 솟았다. 왼편에는 추수를 끝낸 누런 경작지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시골답지 않게 매끈하게 닦인 도로를 따라 네 개의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싸빠레바 반야는 버스의 종점인 싸빠레보(Saparevo) 바로 전, 세 번째 마을이었다. 싸빠레바 반야에는 두 개의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터키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에서처럼 길에서 손을 흔든다고 해서 버스를 세워 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정류장에서만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을 초입에 있는 첫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려고 했다. 헌데 버스에 타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일제히 말려서 마을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리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 그곳은 '일곱 개의 릴라 호수'로 가는 미니버스가 출발하는 곳이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산에 가려고 마을에 들어오니까 나 역시 그런 줄 알고 동네 사람들이 말린 모양이었다. 같은 버스에서 내린 등산복 차림의 한 무리에게 다가가 '인포메이션 센터'의 위치를 물었다. 소피아에서 왔다는 그들의 대답은 '그런 것'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 도시인들을 통역사 삼아 동네 사람들에게 메모해 온 주소를 보여주었다.


Geyzera Information Center

town of Sapareva Banya Geyzer area

Tel: +359 707 2 23 32

e-mail: sssmmm@abv.bg


종이를 한참 들여다본 사람들이 “아! 게이제라! 게이제라!”라고 소리치며 버스가 지나온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왔던 방향으로 거슬러 찻길을 따라 길을 걸었다. 두 번째 정류장에서 걸어서 십여 분 거리, 그러니까 내가 처음 내리려고 했던 첫 번째 버스 정류장 바로 코 앞에 넓고 썰렁한 공원이 간헐천(게이제라, Geyzera)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원의 안쪽 한가운데에 어슷한 삼각형 외관의 인포메이션 센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시인들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는 '그런 것'이 버젓이 말이다. 


센터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청년 하나가 손을 비비며 안절부절 나를 맞았다. 센터 안은 좀 이상했다. 개관을 하기 전 시험 삼아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폐관을 앞두고 가구를 몽땅 빼 휑한 것인지, 각종 브로셔와 A4 용지, 빗자루 등이 한데 섞여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 어수선한 센터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좋은 자리에 아크릴 덮개를 씌운 거대하고 조악한 릴라 산 모형이 보란 듯이 놓여 있었다. 


‘하루에 몇 명이나 이곳에 들를까, 과연 내가 원하는 정보를 구할 수 있을까, 젊은 청년이 하루 종일 이곳을 지키고 있으려면 꽤나 심심하겠다, 그래도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는 게 어디야.’


라는 생각이 센터 안을 둘러보던 그 짧은 몇 초 동안 들었던 것 같다. 


똘망똘망한 눈과 생글생글한 웃음의 청년은 허둥대면서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니, 그날 센터를 나오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감당하기 벅찬 질문을 너무나 많이 쏟아내 그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어쨌거나, 배운지 일 년 밖에 되지 않아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며 연신 미안해했던 그는, 사실 미안해할 일도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 치더라도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을 만큼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고 그뿐만 아니라 역시나 영어 실력 미천한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눈치의 달인이었다.


1. 숙소가 필요해요. 싸고, 깨끗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이곳에 묵으며 온천을 하고 아픈 것을 치료하려는 사람들로 칠팔월에는 항상 방이 모자란다고 그가 말했다. 센터에서 소개할 수 있는(관청에 등록된, 고로 세금을 내는) 호텔과 민박, 펜션 등 여러 곳에 전화로 문의해 보았지만 호텔이란 호텔에는 모두 방이 없었고, 민박집의 경우는 주인장이 지금 바깥 볼일을 보고 있어 집에 들어가면 장부를 보고 전화를 준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즉답을 얻을 수 없어 답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청년의 어머니도 '비공식'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도 현재 만실이라며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청년은 속삭이며 말했다. 하여간 숙소의 연락을 기다리며,


2. 릴라 수도원에 가려고 해요. 버스 시간표를 알려 주세요. 

 →이런저런 서류들로 정신 사나운 책상에서 '싸빠레보↔두쁘니짜'의 버스 시간표가 인쇄된 종이를 찾아냈고 두쁘니짜 버스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두쁘니짜→릴라 수도원'의 시간표를 물었다. 이 역시 바로 답을 얻을 수 없어 답신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릴라 수도원으로 가는 버스가 오후 시간에 단 한 대뿐이라,


3.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릴라 마을을 거쳐 릴라 수도원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또다시 전화 걸기, 가다리기의 반복. 릴라 마을로 가는 방법 또한 마땅치 않았다. 불가리아는 버스 터미널마다 표를 파는 창구와는 별도로 '인포메이션'이라는 창구가 있어 버스 시간에 대해 묻는다거나 이동 경로에 대해 물을 때는 반드시 이 창구를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두쁘니짜의 '인포메이션' 직원과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기에 이 청년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래서,


4. 두쁘니짜에서 '멜닉'에 가려고 해요. 어떻게 가야 하나요.

 →이런 것까지 물어봐서 정말로 미안했다. 멜닉은 싸빠레바 반야에서 무려 130km 떨어진 곳. 한번도 가 본 적 없다는 그는 최선을 다했다.    


질문을 하고, 질문을 이해하고, 답을 준비하고, 그 답을 이해하느라, 그리고 숙소와 터미널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두 시간여를 센터에서 보냈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공연스레 책상을 정리하는 둥 부산을 떨다가 본인이 생각해도 멋쩍었는지 실없이 웃고 말았고, 그때도 역시나 오줌이 마려워 죽을 지경인데다 혹시나 오늘 수도원에 가지 못하면 어쩌나 초조했던 나는 몸도 마음도 조마조마한 상태였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간헐천은 몇 분 간격으로 부르르릉 소리를 내며 하늘로 치솟았다가 촤락!! 하며 맥없이 땅으로 뚝!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억겁의 기다림 끝에 한 곳의 숙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빈 방을 찾아낸 것이 다행스럽고 기쁜 반면, 이 터질 것 같은 오줌보를 해서 도대체 그곳을 어떻게 찾아가나 순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청년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내 배낭을 짊어지고는 센터의 문을 걸어 잠근 다음 그의 낡고 귀여운 빨간색 폭스바겐으로 공원 건너에 있는 숙소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집은 정말로 '싸고, 깨끗하고, 버스 정류장이 코 앞'이었다. 배정받은 방에서 집주인과 청년이 떠나자마자 잽싸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화장실로 달려가 오줌을 눴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걱정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몸은 가벼워졌고 훌륭한 방도 구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그토록 아름답다는 릴라 수도원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청년에게서 받은 버스 시간표 상으로 버스가 들어오려면 아직 이십여 분이 남아 있었지만 동네 구경도 할 겸 숙소를 나섰다. 숙소가 있는 동네는 골목을 마주한 대부분의 집들이 펜션이나 민박집이었는데 간혹 규모가 제법 큰 곳도 있었다. 게다가 찻길 건너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규모의 아쿠아 리조트가 있었다. 산자락 작은 마을은 온천 덕분에 꽤 잘나가는 듯 보였다. 

 간이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것을 핥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표에 버젓이 인쇄되어 있던 한 시 버스는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버스는 삼십 분 후에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한 시 이십 분이 되자 아무도 없던 정류장에 드디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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