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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Apr 23. 2016

[7] 도시인의 자연_불가리아 릴라산.

1부-발칸

한남오거리를 가르는 고가 도로는 그곳을 달리는 차종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살던 집에서 가까웠다. 한강을 건너려는 차들과 남산으로 향하는 차들로 언제나 분주한 곳이라 창문을 열고 사는 봄부터 가을까지 집안이 매우 시끄러웠다. 덜컹대며 커다란 화물차가 지나가거나 특유의 부산한 엔진 소리를 내며 할리 데이비슨이라도 지나갈 때면, 우리는 하던 대화를 멈추거나 TV 뉴스의 몇 대목을 놓치기 일쑤였고, 밤이 깊어 창문을 닫으면 조금 전까지 집안을 가득 메웠던 소음이 단숨에 내 귓속으로 들어와 한동안 머물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창문을 닫으면 우리 집 보다 아늑한 곳은 세상에 없었다. 창문의 간유리를 통과한 가로등 불빛이 방안을 온통 부드러운 오렌지 빛으로 물들였고 늦은 밤 막힘 없는 고가 도로를 달리는 각기 다른 몸집의 자동차 소리는 길 건너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와 나이 많은 은행나무와 시원한 밤공기에 이리저리 부딪히고 깎이고 한데 섞여 저 멀리로 물러났다.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 밤이면 우리의 작은 침실은 병아리 부화기처럼 포근했고, 자동차 소리는 고맙게도 종려나무 숲 너머 작은 해변에서부터 해풍에 실려온 파도소리 같았다.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낮아졌다 높아지는 그 리드미컬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유월의 낙산을, 팔월의 아멧을, 그리고 또 어딘가를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밤의 싸빠레바 반야에는 빛도 소리도 없는 것 같았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가로등은 두 집 건너 삼거리 모퉁이의 전봇대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마저도 열한 시가 되자 꺼져 버렸다. 벌레 울음 소리도, 바람에 머리를 말리는 나뭇잎 소리도,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빛과 소리가 사라진 낯선 고요에 겁이 났다. 무거운 솜이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탁하고 밀도 높은 적막에 둘러싸여 밤새 뒤척이다 동이 틀 무렵에야 비로소 선잠이 들었다. 쪽잠을 자고 일어나 릴라수도원에서 남자가 사준 요구르트에 알바니아에서 가이아로부터 받은 꿀을 넣어 아침밥을 먹었다. 꿀을 한 스푼 듬뿍 떠 요구르트에 섞으며 가이아의 말간 뺨에 찍힌 귀여운 점 두 개를 떠올리는데 자꾸만 남자의 기름지고 붉은 얼굴이 끼어들었다. 어쨌거나 상쾌한 아침이었다.


마을에서 릴라 호수로 가는 체어 리프트를 탈 수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 소피아 여행자 센터의 안내장에 이렇게 써 있었다.


'매일 미니버스가 운행되고는 있지만 정확한 출발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버스에 승객이 다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러니 택시를 타세요!'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미니버스라는 것에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의 사고가 지극히 보편타당 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에 몇 대 없는 소피아발 버스를 타고 두쁘니짜를 거쳐 싸빠레바반야에 들어올 승객들을 때 맞춰 실어 나를 미니버스가 적어도 한 대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여 숙소를 나와 정류장으로 향할 때의 나의 마음은 그날의 날씨처럼 꽤나 만족스러웠다. 시골의 아침 공기는 매우 달고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웠다. 절절 끓었던 낮의 열기가 어찌 그렇게 순식간에 식어버리는지 신기할 정도로 한여름 발칸의 아침 저녁은 기분 좋게 차가웠다. 한쪽 뺨이 따뜻해질 때 즈음 미니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달뜬 마음으로 햇빛을 쬐며 저 산 위를 상상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설레임이 초조함으로 바뀌도록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두쁘니짜에서 들어온 버스는 동네 아줌마 한 명만을 내려놓았고, 그 다음 버스에선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산으로 간다던 미니버스는 정류장에서 반 시간도 넘게 서 있으며 괜한 기대를 품게 하더니 다른 볼일을 보러 간다며 엉뚱한 방향으로 사라졌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숙소를 나선 시간이 여덟 시 반이었는데 어느새 열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동카'를 만난 것은 길 건너 식료품 가게에서 뽑은 세 번째 커피를 비울 무렵이었다. 봉고차 한 대가 멈추더니 차에서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중 아무나 붙잡고 산으로 가는지를 물었는데 그게 동카였다. 그녀는 다른 일행들과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소피아에서 차를 대절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소피아 여행자 센터의 '릴라 호수' 브로셔에서 본 적이 있는 'White brotherhood'의 축제였다. White brotherhood는 철학자이자 음악가인 불가리안 '페테르 되노프'가 19세기말에 만든 비선 기독교 집단으로, 이들의 신년인 8월 19일을 축하하기 위해 호수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동카는 여름휴가를 받아 열 살짜리 아들 아다미르와 함께 호수에서 일주일을 보낼 계획이었다. 경찰 사무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녀는 오래 전 음악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 수년 동안 북한에서 온 남녀 학생을 가르쳤다며 남한에서 온 나를 만난 것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두었다. 그녀는 짐과 사람으로 꽉 찬 봉고차에 내 자리를 마련하고는 산에 오르기 전에 미리미리 가둬야 한다며 화장실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릴라산이 얼마나 영적으로 충만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런 만큼 얼마나 험하고 거친지 이야기했다.


"제일 꼭대기에 있는 일곱 번째 호수까지 다 보지 않아도 돼요. 벌써 시간이 이런데 나중에 내려올 것도 생각해야지요. 천천히 즐기고 느끼도록 해요. 아무리 늦어도 다섯 시에는 리프트를 타구요. 안 그러면 추워서 안돼."


동카의 아들 아다미르의 자리는 운전석 뒷자리 창문 아래 한 뼘 빈 공간에 억지로 만든 곳이었다. 아이는 혼자 앉아도 불편한 자리를 나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과 함께 구불구불 산길을 달렸다. 성지에 가까워지는 것이 기쁜 동카와 그녀의 일행이 화음을 넣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몸을 구기고 앉아 내 코 바로 앞에서 씰룩대는 웬 남자의 옆구리만 쳐다봐야 했던 나는 몇 초마다 몸이 앞뒤로 흔들려 거의 토할 지경이었는데도, 지금의 상황이 하도 고마워 그리고 그들의 노래 소리가 하도 아름다워 신물을 삼키면서도 웃음이 났다.


삼십 여분 만에 산중턱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동카와 나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엄청난 양의 식료품과 텐트 등의 짐을 내리느라 분주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나중에 이메일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산에서 우리는 아주 즐거웠어요. 아다미르는 방학이 끝나 다시 학교로 돌아갔구요. ... 아, 하고 싶은 말은 정말로 많은데 영어로 하려니 너무나 힘들어요..."


동카와 헤어져 호수 가까이에 있는 산장까지 운행하는 체어 리프트를 탔다. 나는 이런 종류의 어설픈 기계에 몸을 맡기는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리프트를 타지 않으면 가파른 흙길을 족히 두 시간은 걸어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남편을 따라 용평스키장의 레인보우인지 뭔지 주제에 맞지 않는 슬로프에 올라갔다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때 리프트에 앉아 매서운 칼바람에 실눈 뜨고 바라본 풍경 못지 않게 리프트에 앉아 내려다보는 릴라산의 숲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 무려 이십 분이나 나무 사이를 나는 동안 발 아래 산길로 짐을 잔뜩 실은 당나귀 몇 마리와 하이커 몇 명만이 지나갈 뿐이었다.



리프트에서 내려 산장을 지나 좁고 가파른 돌길을 십 분쯤 기어올랐다. 힘든 길이었다. 그 길을 오르느라 근육 없고 지방뿐인 나의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고 고개를 드니 거짓말처럼 첫 번째 호수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와 나는 딱 서른 살 차이가 난다. 올해 69세.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라 이십 대에 고향을 떠난 엄마는 경기도 포천 어딘가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높은 산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있구나 감탄했다고 했다. 그전까지 엄마가 알던 세상은 평평하고 우묵한 땅과 동그랗고 야트막한 동산이 전부였다. 아름다운 산에 오면 엄마 생각이 난다.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렸을 처녀적 엄마가 포천의 이름도 모를 산에서 황홀경에 빠져 있는 모습이 그려져, 그리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엄마는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나 혼자 보기 너무나 아까워 그만 목이 메이고 말았다.



산길이라고 부르기에 너무나 평평하고 잘 다져진 길을 따라 걸었다. 내 왼쪽으로 Lower, Fish, Three-leafed 라고 이름 붙여진 1,2,3번 호수가 차례로 나타났다. 넓고 완만한 경사로, 예쁜 구름이 걸린 파란 하늘, 부드러운 바람, 따뜻한 햇빛. 산을 걷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경치를 구경하느라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다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가져온 비스킷을 먹으며 이마가 뜨거워지도록 하늘과 산과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애기 엄마가 된 친구가 십여 년 전에 전화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행복하니?" 남자 문제였는지 엄마와 싸운 직후였는지 신세타령을 한참 늘어 놓다가 뜬금없이 저걸 물었다. 서로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낯간지러워 위로는 못하고 우스갯소리나 주고 받으며 낄낄대는 격 없는 사이라 나는 그녀의 말에 너무나 당황하고 말았다. '행복하니?' 우리 모두 그럽시다! 하고 쉽게 외치는 그것, 모두 다 추구하는 대단한 그 말이 낯설고 어색해서, 가뜩이나 전화기 때문에 뜨거워져 있던 귓볼이 달아올랐다. "뭐 잘못 먹었냐? 시끄럽고, 살이나 빼자." 따위의 얼버무림으로 대화를 끝낸 그날 이후 그 단어는 입 밖에 내기 민망하고 껄끄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실남실한 미소가 번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이 보였다. '아, 날씨 좋고 과자도 맛있고 기분 째진다.' 생각해 보니 그러면 그냥 '행복하다.'라고 하면 되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러면 되는 것 같았다. '행복해.' 거창한 것이 아닌데 그동안 퍽이나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가리아에서뿐만 아니라 발칸에서 가장 높은 산인 릴라산은 이백여 개의 빙하호수를 가지고 있다. 그 중 ‘일곱 개의 릴라호수’는 산의 북서쪽 뾰족한 세 개의 봉우리 아래의 둥근 협곡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마지막 일곱 번째 호수로 가는 하이킹 코스는 어려운 코스와 쉬운 코스로 나뉘고, 어려운 코스는 일곱 개의 모든 호수를 다 들러 걷는 길, 쉬운 코스는 평지에 가까운 길을 걸어 곧장 다섯 번째 호수 간 다음 여섯, 일곱 번째 호수로 오르는 길이다. 나는 쉬운 코스를 선택했기 때문에 첫 번째 호수부터 네 번째 호수까지는 멀찍이서 내려다 보았고 직접 호수 가까이에 가는 것은 '콩팥'이란 이름의 다섯 번째가 처음이었다.



점심 무렵, 가파른 바위 절벽이 내려다보고 있는 호수는 많은 사람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바람에 잔물결이 호숫가에 부딪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맨발로 풀밭을 통통 뛰고 있는 아이의 투명한 웃음소리와 바지를 돌돌 걷어 올린 젊은이가 발로 물을 잘박잘박 가르는 느릿한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흥이 많은 우리네 같았으면,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옆 나라 터키 사람들 같았으면 진작에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한데 엉켜 춤을 추었으리라. 이 넓은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각자 오롯이 산을 느끼는 그런 곳. 동카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호숫물에 손을 씻었다. 차고 맑은 물을 손바닥을 오므려 가득 담아 보았다. 햇빛이 별이 되어 내 손바닥 안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어디선가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호수 둘레로 난 산책길을 걸었다. 한 곡이 끝났고 호숫가에 앉아 황홀한 표정으로 연주를 듣던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곧이어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햇빛에 잘 덥혀진 바위에 앉았다. 청명한 하늘처럼 맑은 바이올린 선율이 바위 절벽에 부딪쳤다 물 위에 살포시 앉은 다음 땅바닥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잡초와 꽃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늘이, 산이, 호수가, 오늘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뛰었다. 혼자 보기 아까워 남편의 얼굴이 엄마의 얼굴이 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주를 끝내고 팔을 들어올려 청중들에게 인사를 한 연주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이름은 보야나. 놀랍게도 그녀는 공연을 하러 한 달 전 한국에 다녀왔다며 서울, 고양, 대전, 부산... 도시 이름을 줄줄이 대더니 김치, 불고기, 보쌈, 갈비... 음식 이름까지 읊어댔다. 요상한 경험이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의 나라 높디 높은 산중에서 고양, 대전, 보쌈, 갈비를 듣다니. 그녀와 헤어진 후에도 어색한 발음의 고양, 대전, 보쌈, 갈비가 생각나 혼자서 낄낄댔는데 그것은 여섯 번째 호수를 향해 격한 오르막 자갈길을 기어오르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섯 번째 호수의 둔치에 서니 네 번째인 쌍둥이(Twins)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쉬운 길은 여기서 끝이 나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버석하게 마른 흙과 크고 작은 자갈로 길이 꽤 미끄러웠는데 얼굴이 뜨거워지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 오르막길 중간 즈음에 샘물터가 있어 한숨 쉬어갈 수 있었다. 'Rila'라는 이름은 고대 트리키아 말로 '물이 충분한'이라고 한다. 산의 물이 얼마나 차고 달았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샘물터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여섯 번째 호수 눈(Eye)이 나타났다. 동그란 호수 주변으로 자갈과 키 작은 잡초들이 산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여섯 번째 호수에서 일곱 번째 호수로 가는 길은 이번 산행 중 가장 가파른 구간으로 그 거리가 짧아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지만 평소 운동과 담 쌓고 사는 나는 돌부리를 붙잡고 산길을 기어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힘든 길을 올랐는지 남편에게 이야기해봤자 믿지도 않겠지. 그것도 혼자서 말야.'


목덜미가 간질간질하여 뒤를 돌아보니 눈 호수와 신장 호수가 그림처럼 놓여 있었다. 세상에나,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다 있구나.


드디어 일곱 번째, 눈물(Tear) 호수에 도착했다. '엄마, 여보, 나 해냈어요!’ 정상을 코 앞에 두고 일곱 번째 호수 앞에 섰을 때의 나는, 비록 산행의 대부분이 평지에 가깝고 게다가 잘 다져진 길이었지만, 마치 산악인이 된 것만 같아 잔뜩 고무되었다. 운동과 담 쌓고 사는 내가 이역만리 남의 나라 남의 산의 정상에 올랐으니 엄청난 성취감에 도취된 것은 부끄럽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곱 번째 호수를 구경하고 몇 발걸음 위 정상에 오르고 보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코흘리개 꼬맹이들이 흙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발 2300m가 넘는 릴라의 일곱 개의 호수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정상에 섰다. 첫 번째 호수부터 여섯 번째 호수까지 말 그대로 한 눈에 들어왔다. 내 등 뒤에는 일곱 번째 호수가 있었다. 여기저기 놓인 바위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경이로운 경치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만약 불가리아를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단 하루 주어진다면, 여러분, 이곳으로 가세요.



어느덧 네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산으로 올라오던 길, 흔들리는 차 안에서 동카가 했던 충고가 생각났다. ‘다섯 시에는 리프트를 타야 해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설 때 어쩐 일인지 아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넘치게 행복했고 충분히 즐거웠다. 산을 내려오는 길, 저 아래에서 당나귀에 짐을 싣고 올라오는 이들이 보였다. 십대 초반의 남자 아이와 중년의 남자였다. 발칸 사람들은 툭하면 '우리 나라 가난한 나라'라는 말을 즐겨 했는데 어린 아이가 일하는 나라라면 가난한 나라가 맞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것은, 한 나라 안에서도 피부색이 진할수록 가난하고 힘든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동남아시아, 터키, 발칸 모두에서 마찬가지였다. 피부색이 검어 힘든 일을 하게 된 것인지, 힘든 일을 해서 피부가 검게 된 것인지, 만약 후자라면 왜 그들의 아이들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초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릴라의 호수에서 여행객의 짐을 실어나르던 그 아이의 얼굴도 유난히 검었다.




씁쓸한 기분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와 어느새 산중 분지에 닿았다. 해가 자리를 바꾸어 하늘이 빛을 달리했고 산은 아까와는 또 다른 얼굴로 윤이 나고 있었다. 산이라는 곳은 그저 나무가 빼곡한 줄로만 알고 살던 내 눈에, 이 높은 곳에 평평한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신기하기만 했다. 카페트처럼 푹신한 풀을 밟으며 아트막한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 언덕 너머에서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백색의 말과 한 여자가 각자의 갈기를 흩날리며 나타났다. 눈 부시게 푸른 땅과 그림처럼 파란 하늘 사이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들에 모습에 감탄한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배실배실 웃고 말았는데 그런 내게 그녀도 나와 같은 웃음으로 답했다. 정말이지 발칸 여행을 시작한 이래 이렇게 즐거운 날도 없었다.



오래된 냉장고의 간헐적 소음뿐인 조용한 내 집에서 한가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이따금 지난 여행을 곱씹게 된다. 그럴 때면 대개 무서운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태국 꼬 따오의 깊은 바다 속에서 내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바닷물의 쓰고 짠 맛, 비 오는 터키 아마시아의 미끌거리는 성채에 혼자 남겨졌을 때의 두려움 따위들. 오늘처럼 가슴이 터질 만큼 즐거운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 즐거운 기억들이 무서운 기억들을 단단히 덮어 버릴 거라고 기대한다. 겁보 탈출의 그날이 어서 오기를. 


하지만 체어 리프트 앞에 다시 섰을 땐 역시나 긴장되고 무서워서 멀쩡했던 배까지 살살 아파왔다. 내 차례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뭉그적거리다가 방법을 찾기로 했다. 비행기에서도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더 공포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리프트를 함께 타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 낯선 나라를, 그것도 혼자서 여행하는 주제에 이 까짓 거 타는 게 무섭다고? 나는 혼자 여행은 꿈도 못 꾸겠는걸?"


리프트에 나란히 앉아 레니가 말했다. 그녀는 리프트에 함께 앉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나를 싸빠레바 반야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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