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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Apr 29. 2016

[8] 불가리아에서 가장 작은 마을, 멜닉.

1부-발칸

맡은 바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정신을 무장한 관광객들만이 비실거리며 상점가를 돌아다닐 뿐, 여름철 발칸의 한낮은 높고 파란 하늘이 무색할 만큼 무기력했다. 인정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이 너절한 거리와 누추한 가옥들 그리고 표면에 드러난 가난까지 증발시켜 버렸고 시큰거리는 눈으로 간신히 바라본 도시는 마치 도색을 막 끝낸 시대극 세트장 같았다. 드센 태양을 피해 다들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해 질 녘 산책은 일종의 보상이었다. 한껏 치장한 동네 사람들이 향수 냄새를 풍기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하루 종일 꼬리 조차 보이지 않던 고양이와 개들도 부스스 기지개를 켜고 기어 나와 주민들의 다리 사이를 돌아다녔다. 표백된 도시는 비로소 생기를 띠었다. 


내 집의 안락함을 버리고 비싼 비행기값을 들여 이 멀리까지 왔으니 여행자로서 환한 대낮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랬다.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숙소에 누워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죄책감이 들었다. 야외 카페의 차양 밑 그늘에 앉아 있으면 조금 덜했다. 반면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는 괜찮았다. 그리고, 죽도록 걸어 힘들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 되면 '아, 나는 참 멋진 사람이야.' 따위의 헛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더 힘들었다. 비장한 각오로 밖에 나갔다가 더위와 먼지와 도시다움에 사기가 꺾여 숙소로 기어 들어오고는 했는데, 땀이 식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그 놈의 켕기는 기분이 내 등짝을 떠밀었다. 그렇게 들락날락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둠이 찾아왔다. 평상시 좀 열심히 살았다면 여행지에서의 게으름을 즐길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리 산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불가리아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작은 town'이란 타이틀을 가진 '멜닉'으로 가기 위해, 토요일 아침 싸빠레바 반야를 나가는 첫차를 탔다.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정류장에 들어왔다. 버스가 시골길을 벗어나 두쁘니짜 도심 끝에 다다랐을 때 릴라산 위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이른 시간이었고 다음 버스까지는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300원짜리 커피와 150원짜리 빵으로 아침밥을 먹으며 터미널의 벤치에 앉아 일광욕을 즐겼다. 여덟 시가 조금 넘어 소피아발 첫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그 버스에서 한눈에 보아도 한국 사람인 남녀가 내렸다. 여자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을 쫓아가 무언가를 물었고, 남자 역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이처럼 이른 시간, 그것도 볼 것 없는 소도시에서 동포를 만난 반가움에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런데, 여러분, 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않나요? 홈쇼핑 쇼호스트 뺨치게 상냥했던 나의 인사에 그들은 달갑잖은 얼굴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어디 가냐는 나의 질문에 인사 없이 남자만 대꾸했다. "릴라 호수요." 잠시 후 싸빠레바 반야행 버스가 들어왔다. 그들에게 저 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여자도 자신이 타야 할 버스를 알아보았다.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버스에 올랐고, 남자는 건성으로 인사말을 남기고는 여자를 뒤따랐다. “안녕히 가세…” 웃고 있던 내 얼굴의 주름이 미처 펴지기도 전, 그들은 순식간에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동남아시아 여행 중에 만났던 한국 사람들의 반응이 대개 이러했다. 그곳은 한국 여행객이 워낙 많은 곳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인사하는 것을 자제했다. 하지만 동포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을 보는 것 보다 더 어려운 발칸에서 반가워하기는커녕 성가시다는 그들의 반응에 ‘아, 세상은 역시나 알 수가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이러다가 남극의 허허로운 눈밭에서 한국 사람과 독대한다 해도 차가운 반응이 돌아올까 무서워 안면 몰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에 이유 없는 것은 없다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한국인은 외국에서 한국인을 멀리하는가? 질문이 잘못 되었나. 왜 한국인은 한국인을 멀리하는가? 설문조사기관에 의뢰한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두쁘니짜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싼단스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한 시간여를 보낸 뒤 '멜닉'행 미니버스를 탔다. 싼단스키에서 멜닉까지 삼십 분이 걸렸다.


여행 안내서마다 세 가지 말로 멜닉을 수식했다. 


제일 작은 'town'

포도주

모래 피라미드



10유로에 아침밥 포함, 더블 침대와 소파, 화장실이 있는 독방을 얻었다. 짐을 내리고 호텔 주인인 마리오에게 물었다. 


"멜닉에서 뭘 하면 좋을까요?"

"아무 것도 하지마, 지금은 너무 더워."


마리오의 여동생에게 모래 피라미드로 가는 길을 물었다. 


"지금은 안돼. 너무 더워."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던가, 아님 저기 그늘에 앉아서 포도주나 마시라고." 

마리오와 동생이 입을 모아 말했다.


멜닉은 유명한 와인 산지라고 했다. 마을 유일의 큰길을 마주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일 층은 식당 위층이 호텔이었다. 식당들마다 각자의 와이너리에서 만든 포도주를 홍보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 내놓은 포도주 중에는 버젓이 라벨을 달고 나무 상자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도 있었고 커다란 페트 병에 담겨 뜨거운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것도 있었다. 점심 시간이라 식당마다 사람들로 가득했고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빼곡한 음식 접시들 사이에 여러 개의 포도주 병을 세워 두고 벌건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띠었다.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술을 좀 마실 줄 안다면 여행의 흥이 지금보다는 더 할 텐데. 나는 그저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진작에 말라버린 건천과 나란한 모래투성이 길을 따라 마을을 걸었다. 어느새 샌들을 신은 나의 검은 발이 뽀얀 먼지 양말을 신고 있었다. 마을 초입의 숙소에서 채 십 분도 걷지 않았는데 벌써 마을 끝에 닿아 버렸다. 도대체 영어에서 'town'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 고찰에 의한 분류;

city - 대성당 또는 대학이 있다. 혹은 둘 다.

town - 시장이 있다.

village - 대성당도 시장도 없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분류;

city - 인구 밀도가 높다, 대부분의 중요한 행정관청이 있다, 많은 것이 집약되어 있다. town보다 더 크고 더 다양하다.

town - 독립된 지방 정부, 시장, 은행, 상점, 기타 상업시설이 있다, 주민들이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village - 지방 정부와 시장이 없다. 은행, 상점,기타 상업 시설이 적다, 주민들은 대개 농업에 종사한다.



1878년 불가리아가 오토만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멜닉은 여전히 오토만에 속해 있었다. 1차 발칸전쟁에서 오토만이 패하자 불가리아가 드디어 멜닉을 되찾게 되지만,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멜닉의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전쟁 전, 2만의 인구, 1300채의 가옥, 17개의 교회를 가졌던 멜닉은 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현재는 208명의 주민과 하나의 교회가 남아 있을 뿐이다. 농약 가게를 하셨던 시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더니 농약상 할 때 받아놓은 비닐 봉지가 아직도 몇 상자나 있지 뭐니." 시어머니가 장사를 그만둔 것은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역사 속 과거의 멜닉은 분명 'town'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이곳은 'village'여야 마땅할 듯 싶은데 정부가 공인한 제일 작은 'town'이라고 하니 불가리아어를 영어로 옮김에 있어서의 차이인지 아니면 내가 이틀 동안 이 잡듯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한 시장, 은행, 관공서 등이 말라 비틀어진 개천 아래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인지 역시나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호텔에 체크인하면서 마을 관광 지도가 있는지 물었을 때, 그리고 마을에 단 하나 있다는 ATM을 찾아가기 위해 약도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왜 마리오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역시 숙소를 떠난 지 몇 분만에 알게 되었다. 마을 끝에 있는 ATM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서 마리오가 그렸던 것은 약도가 아니라 사실상 마을의 전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마을 전체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하지만, 식당은 전혀 물갈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벌겋고 행복한 얼굴로 웃고 마시고 먹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혼자 여행할 때 피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왁자왁자 북적북적 하하호호 즐겁게 떠들고 마시는 테이블 사이에서 혼자 앉아 밥을 먹는 일. 점심보다 저녁이 더 좋지 않고 주말이라면 더욱 피하고 싶다. 장사가 잘되는 식당에서 4인용 혹은 6인용 식탁을 혼자 차지하고 앉았을 때의 불안함은,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모스크 안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못지 않다. 더군다나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는 내가 시키는 음식이래 봤자 값싼 채소로 만든 요리들뿐이니 말이다. 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다른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나에게 눈치 줄 시간 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생수만큼 싼 샐러드 하나만 시키기가 혼자 켕기어 샐러드 값 두 배에 달하는 거금을 내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게 되었다.



발칸 사람들은 뭐든 할거면 여섯 시 이후에 하라고 말하길 좋아했다. 호텔 식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답게 다섯 시에 숙소를 나섰다. 사암 피라미드를 보러 간다는 나에게 그들이 보여준 호들갑스럽고 거창한 응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들이 가리킨 방향에는 손에 잡힐 듯한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기에 즐거운 기분으로 늦은 오후의 산책을 시작했다. 


시실 멜닉을 택한 이유는 구글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에서 멜닉은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사냥감을 찾아 하루 종일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다가 길을 잃은 후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스레함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기 딱 좋은 그런 곳. 초목이 푸르른 골짜기에 자리한 아담한 마을은 따뜻한 빛을 발하고, 그 마을을 포근하게 감싼 산의 등성이에는 푸딩 위에 뿌려진 캐러멜 시럽처럼 붉은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진 속 분위기를 머릿속에 그리며 호텔 직원이 알려준 길로 들어섰다. 마을 안쪽, 어느 집과 집 사이에 어떤 교회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언뜻 보면 놓치기 십상인 작은 사잇길이었다. 그 길로 들어서 건물 몇 개를 지나자 급작스런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폭우에 토사가 쓸려 없던 길이 생긴 것처럼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 사이로 난 가파른 산길에 나무뿌리와 돌부리가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다. 좁은 오르막 양쪽으로 빼곡히 서 있는 키 큰 나무들 때문에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곳임이 분명했다. 길은 축축하고 미끄러웠다. 산을 오른 지 오 분도 채 안되어 왜 호텔 식구들이 그런 대단한 응원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아 후회와 함께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중간 즈음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 노부부를 만나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두근거리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몸의 열기와 나무가 뿜어대는 습기로 열대의 정글에서 전력질주를 하는 것처럼 숨이 차고 힘들었다. 길은 갈수록 험해져 어떤 구간에서는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올라서야 했다. 바깥 세상은 건조하고 뜨거운 사막이었는데, 이곳은 사방이 온통 이끼로 덮인 어두침침한 나무 터널.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계속 산길을 오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산을 거진 올랐을 때 드디어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왼쪽으로 가면 무슨 교회, 오른쪽으로 가도 무슨 교회' 


오른쪽을 택했다. 발칸을 여행하면서 빵과 치즈를 많이 먹은 탓에 달랑 하나 준비해 온 긴바지의 허리가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내가 그렇게 오른쪽 길로 들어서 억센 잡초와 말라 죽은 관목 가지에 다리를 온통 쓸려가며 산을 헤매다 발견한 것은 오래된 교회의 흔적 하나가 전부였다. 


왔던 길을 돌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산길을 걸었다. 그랬더니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마을의 전경과 함께 파리미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제의 나라의 카파도키아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멜닉의 피라미드는 ‘제일 작은 타운’에 어울리게 정말로 작고 앙증맞았다. 솔직히 좀 시시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섭고 힘든 진흙탕 터널 길을 기어오르고 온갖 풀에 다리를 쓸린 후 만난 활짝 열린 풍경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딘가 바위 위에 느긋이 앉아 붉은 피라미드와 하얀 집들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해가 이미 뒷산에 걸려 있었기에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의 나의 꼴은 얼굴은 터질 듯 붉고 온 몸은 땀과 먼지투성이였다. 호텔 앞에 앉아 한결 시원해진 저녁 바람을 쐬고 있던 호텔 식구들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연신 ‘브라보’를 외쳐댔다. 멜닉의 앞동산은 정말이지 그럴 만했다. 어쨌거나, 'must do' 혹은 'what to do' 리스트에 있는 것 중 하나는 완수했다. 뿌듯함 마음으로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으며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메신저로 하루 일과를 보고하며 피라미드의 사진을 보냈다. 그것을 보고 그가 하는 말, "우와! 카파도키아다!" 흠.

<갈림길에서 왼쪽과 긴바지, 잊지 마세요.>


이튿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호텔 주인 마리오의 아버지가 내 식탁 앞에 손을 모으고 서더니 공손하게 ‘마담’이라고 부르며 


"커피를 드릴깝쇼? 차를 드릴깝쇼?" 


깍듯이 물었다. 백발의 노인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 있자니 엉덩이가 들썩들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방값에 포함된 아침식사는 풍성했다. 라면 그릇 크기의 볼에 가득 담긴 순두부 질감의 요구르트, 기름 발라 구운 빵, 계란 물을 입혀 구운 빵, 치즈, 잼으로 한상이 차려졌다. 불가리아의 요구르트는 정말로 대단한 물건이어서 한번 그 맛을 들인 이후 500그램짜리 한 통도 거뜬히 먹어 치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아랫배를 쥐어 보니 한 손으로 잡히지 않았다. 고무줄 바지를 입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새삼스러웠다. 



아침을 먹은 다음, 하루에 세 번 마을 앞 도로를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옆 마을 '로젠'에 갔다. 로젠은 멜닉을 지나 피린산 골짜기 안쪽으로 더 들어가 있는 작은 곳으로 멜닉 ‘타운’ 사람들은 이곳을 '빌리지'라고 불렀다. 찾아 본 바로는 로젠의 주민은 80명이 전부였다. 버스의 종점인 마을 광장에서 내려 산 쪽으로 난 찻길을 따라 십오 분쯤 걸었다. 버려진 교회 건물이 하나 나타났고 그것을 지나 조금 더 오르막을 오르니 잘 손질된 정원 뒤로 로젠 수도원이 나타났다. 


불가리아 남부 피린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인 로젠 수도원은 중세에 처음 지어졌다. 헌데 교회와 절들은 어쩌면 이다지도 하나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지, 불타고 파괴되고 약탈 당한 후 불가리아 전역에서 모인 성금으로 18세기에 재건된다. 수도원의 부속건물이 중정의 교회를 감싸고 있는 구조가 릴라 수도원과 같았다. 아늑하고 기분 좋은 곳이었다. 중정에 드리워진 포도 넝쿨은 촉촉히 젖어 싱그럽게 빛났고, 스며든 빗물에 결을 돋운 나무 기둥에서는 그윽한 사향냄새가 났다. 중정의 수도원 교회는 15세기 이전에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검은 옷의 젊은 수사가 지키고 있는 교회의 안쪽 벽에 16세기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화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내가 시간을 들여 생과 사, 죄와 벌, 고통과 광명, 지옥과 천국을 구경하는 동안, 누군가는 성화에 입을 맞추었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스브스브 기도를 올렸다. 본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 



들은 얘기로는 수도원 뒤 산길을 따라 두어 시간 걸으면 멜닉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수도원 앞 정원에서 성화 등의 기념품을 파는 노인에게 물어 산길로 접어 들었다. 길의 상태가 괜찮으면 멜닉까지 걸어가 볼까 싶었지만 나 같은 겁보에 트래킹 초보가 혼자 걷다가는 실종되기 딱 좋아 보여 그만 두었다.



로젠에서 멜닉으로 가는 방법은 한 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거나 6km를 걷는 것뿐이었다. 차를 얻어 타고 멜닉에 돌아오니 마을 전체에 전기가 나가 있었다. 호텔 식구들에게 물으니 전기가 나간 지 한참 되었다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알바니아의 베랏에서 전기 없는 하루를 보냈던 날과 달리 오전 내내 비가 내려 다행히 덥지는 않았지만 온수가 없으니 샤워를 하거나 빨래를 할 수도, 휴대폰을 볼 수도 없어 꽤나 심심했다. 방안에서 뒹굴다가 답답함을 못 참고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와 하릴없이 동네를 걸었다. 전기가 있든 없든 발칸 사람들은 가만히 있기의 달인들이라 나 같은 관광객들만이 좁은 마을 여기저기를 서성일 뿐이었다. 



해가 지기 전 전기가 돌아왔다. 불행이라면 발칸의 여름 태양은 아주 늦게 진다는 사실로 전기가 돌아 온 시각은 여덟 시 반을 넘겨서였다. 보통 이른 저녁을 먹는 나로서는 엄청난 허기를 참아야 했는데 전기 없이는 식당에서 요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식당은 아주 조용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밤은 종업원에게 말 한 번 붙이기 힘들 정도로 식당이 분주했지만 일요일 저녁의 멜닉은 버려진 도시처럼 썰렁하기만 했다. 어제와 달리 음악도 틀지 않은 식당에서 호젓하게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치즈 튀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무게를 재 보니 무려 3kg이나 불어 있었는데 그것의 일등공신이 바로 불가리아의 치즈 튀김이다. 카쉬카발 펜네(Kashkaval Pane)라는 불가리아 이름의 치즈 튀김은 노란 치즈에 계란 물, 밀가루, 빵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겨낸 것으로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요리다. 불가리아를 여행한 이 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이 치즈 튀김을 먹었으니 몸무게가 3kg만 늘어난 것은 어쩌면 감사해야 할 일이다. 


<치즈 튀김 혹은 구이>
<마리오 호텔, 식당, 식품점에서 잡일을 하는 란코 아저씨는 심심했던 멜닉에서 나의 말동무였다.>


다음날 새벽 다섯 시 반, 일흔이 넘은 마리오의 아버지가 푸른 여명 속에서 가게 문을 열고 물건들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전혀 그려지지 않는 나의 노년을 걱정하며 호텔에서 일하는 란코 아저씨가 미리 챙겨 준 아침 도시락 봉지를 들고 멜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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