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발칸
얼마 있으면 회사를 그만둔 지 삼 년이 된다. 그 회사에서 그전까지 받아 본 적이 없는 월급을 받았고, 그전까지 받아 본 적이 없는 상처를 받았다. 회사를 그만둘 당시 마음이 너덜너덜 닳아 있던 나는 마지막 날 사무실 문턱을 넘으며 이제 두 번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여행을 갔다. 태국에서 말레이시아로, 터키로, 조지아로, 아르메니아로.
여행에서 돌아오니 서울은 여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남서쪽으로 난 살던 집은 여름이면 집안이 그야말로 불덩이가 되었는데,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에 에어컨을 틀지 않았더니 엉덩이에 그만 땀띠가 나고 말았다. 땀을 뻘뻘 흘려 준비한 저녁밥을 퇴근한 남편과 함께 먹은 다음 간신히 숨통이 트일 정도로만 바람이 불던 어느 늦은 저녁, 단골 약국을 찾아가 원피스 자락을 들어 올려 약사 아줌마에게 엉덩이를 보였다. 열꽃이 활짝 핀 나의 살갗을 보고 빼곡한 약장을 배경으로 카운터 너머에 서 있던 그녀는 예의 그 놀란 표정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그녀의 한숨에 나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땀띠가 준 면죄부를 들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남반구의 발리는 시원하고 건조했다. 여름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지독했던 서울의 여름도 끝나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무직자라는 신분과 그것으로부터 내가 느끼는 구속감에는 달리진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지겹도록 자문했지만 답을 얻는 것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가정주부라고 대답했다. 아직 미혼이거나 결혼과는 상관없는 나이의 그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해서 나의 대답에 놀라 나이를 묻기 일수였고, 간혹 가정을 버리고 나온 가정주부라며 놀기도 했다. 내가 묵었던 곳들이 주로 저렴한 호스텔이었으니 어찌 보면 그런 곳에서 만난 여행자들로부터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흔을 앞둔 가정주부가 하루 10유로짜리 호스텔에 묵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쪽과 저쪽에 한쪽씩 발을 걸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짧은 생각으로 불편한 상황을 피해 보고자 가상의 직업에 대해 고민해 봤지만 현실에서도 찾지 못한 직업을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농부라고 했다면 누군가는 믿어 주었을까?
“어느 날 신문에서 불가리아의 집값이 아주 싸다는 기사를 봤어. 그걸 보고 집을 사러 이곳에 왔지. 왜 루쎄였냐고? 글쎄, 다뉴브강도 있고, 그냥 여기가 좋았어.”
맨디는 그렇게 루쎄에 왔고 이곳에서 마크를 만났다. 당시 루쎄의 한 호텔의 보수 공사 일을 하고 있던 마크에게 호텔 직원이 마크처럼 영국에서 온 여자 투숙객이 있다고 알려 주었는데 그 여자가 맨디였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함께 돈을 모아 지금의 집을 구입했다. 루쎄 시내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조용한 주택가, 작고 낡은 집을 고쳐 호스텔의 문을 연 것이 육 년 전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 집을 골랐을 때 주변 사람들은 호스텔을 하기에 집이 너무 작다고 걱정했어. 하지만 우린 아주 만족이야. 적당히 작잖아. 손님으로 붐비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니거든. 처음 이 집을 샀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마 넌 상상도 못할 거야. 정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고. 우린 지하실에 임시 거처를 만들고 집을 고치기 시작했어. 벽과 뼈대만 빼고 새로 다 만들고 칠하고 손보고 고쳤다고 보면 돼. 문고리 하나, 전등 하나 어느 한 군데 마크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까. 화장실도 침실도 부엌도 다 마크가 만든 거야. 집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때 영국으로 돌아가 짐을 가져왔지. 저기 골목에 보이는 하늘색 밴 있지? 저걸로 요크셔와 리버풀에서 짐을 실어서는 2박 3일 동안 차를 몰고 루쎄로 내려왔어. 우린 지금도 지하실에 살아. 대부분의 시간을 마당에서 보내니 뭐 어때.”
눈가의 자글자글 한 주름을 더 깊게 만들며 맨디는 그녀가 밭에서 직접 키워 말렸다는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루쎄는 겨울에 눈이 굉장히 많이 와. 몇 미터씩 쌓이고 치우면 또 그만큼 쌓이고는 하지. 그래서 겨울에는 호스텔 문을 닫고 농가에서 보내. 농가? 여기서 몇 시간 떨어져 있는 산골마을인데, 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린 정말 그곳을 사랑해. 호스텔 문을 여는 동안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 그곳에 가려고 한다니까. 그렇지, 둘 다 호스텔을 비울 수는 없으니까. 그곳이 얼마나 산골인가 하면, 제일 가까운 이웃집이 수십 미터나 떨어져 있어. 그래서 밤이든 낮이든 마크는 신나게 공구를 돌리고 망치질을 하고 샌드백을 두들겨 패고, 하여간에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좋대. 그곳에 내 밭이 있거든? 정말 모든 걸 다 심어 놓았어. 네가 알고 있는 채소란 채소는 정말 모조리 다. 마을 어귀에서 버스에서 내리잖아? 그럼 심어놓은 아이들이 궁금해서 한걸음에 달려 간다고.”
“이해해요. 몇 년 전에 시어머니가 눈 수술을 받으셔야 했어요. 수술 날짜를 잡아야 했는데, 그때가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어요. 시어머니는 옥상 작은 텃밭에 (텃밭은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위해 만드신 거래요. 전 시아버지 얼굴은 사진으로만 봤어요.) 정말 별거 별거 다 심으시는데요, 지금 우리가 앞에 있는 이 테이블만한 땅이라서 농사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혼자 사시는 시어머니가 봄부터 시작해 가을까지 그거 가꾸는 재미로 사세요. 눈 수술을 해야 할 시기에 그 옥상 텃밭에 아직 열매가 매달려 있으니 시어머니는 그것을 며칠씩 내버려두고 서울에 와 계실 수 없다는 거예요. 여름에는 한국도 아주 덥고 뜨거워서 물을 자주 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결국엔 병원에서 수술하라는 날짜보다 더 늦게 하셨지 뭐예요.”
“그래, 그렇게 된다니까,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 밭! 내 호박! 내 가지! 내 토마토! 막 이면서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간다고.”
두 평 남짓한 호스텔 마당에는 마크가 만들었다는 테이블과 역시 그가 만들었다는 바비큐 화덕, 그리고 그가 맨디를 위해 만들었을 화단이 디귿자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화단에는 토마토와 잎사귀 채소들 그리고 소박한 꽃들이 한가득이었다.
“딸애는 병원에서 일해. 병원이라고 해서 의사나 간호사 뭐 그런 일하는 건 아니고 그냥 접수 직원이야. 너는? 아이가 있어?”
맨디는 젊어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커서 또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가 좋았다. 꾸미지 않은 옷차림, 희끗희끗 센 머리, 굵은 손마디, 그리고 눈가의 주름. 그녀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흐르고 있었고, 그녀에게는 벽도, 가식도, 허세도 다른 세상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제사 생각하면 어찌 그런 이야기까지 털어놓았을까 싶은 그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기 문제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시댁에 대하여, 친구에 대하여, 일에 대하여, 한국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나에 대하여...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능력이었다.
“아니요. 아이 없이 우리끼리 즐겁게 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그게 잘 포기가 안 되나 봐요. 그 문제로 어머니도 괴롭고 저희도 괴롭고 하여간 그랬어요.”
“너희 선택인데 그걸 왜 시어머니가?”
“음, 한국의 부모 자식 관계는 서양하고 달라요. 대부분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고, 간혹 결혼해서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저희가 아이를 낳고 안 낳고의 문제는 저희 부부의 문제가 아니라 온 가족의 문제 비슷하게 다뤄져요.”
“세상에!”
“실은요, 저 회사 그만둔 지 이 년도 넘었는데 시어머니는 모르세요. 평생 일하고 사신 분이라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이 집에서 논다는 것을 이해 못 하시거든요. 게다가 두 달씩이나 남편 혼자 내버려두고 여행하고 있다는 거 아시면 정말 충격 받으실 거예요. 불쌍한 내 아들, 여자 잘못 만나 고생한다고. 매주 일요일마다 매번 비슷한 시간에 시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드리는데요, 여행 온 이후로 한 번도 거르지 않았어요. 어떻게 했나 하면요, 남편이 미리 정보를 줘요. 오늘 서울 날씨는 조금 흐렸다거나, 태풍이 왔는데 남부 지방에만 피해가 있었다거나 등등이요. 그럼 그것을 보고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는 거예요. ‘어머니~ 뭐 하세요? 저녁 드셨어요? 서울은 좀 덜 더워요.’ 이렇게요. 응, 정말 그래요. 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요. 지난주에는 불가리아 남부 로젠의 웬 야산에서 전화를 드렸고, 그전에는 코소보 프리슈티나에서였고, 그전에는 마케도니아였고, 알바니아였고 그랬어요. 다행인 것은 알바니아 북알프스의 정말 정말 깡 시골에서도 세상에나 국제 전화가 빵빵 잘 터진다는 거예요.”
그녀와 함께 배꼽이 빠져라 웃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한국 이야기 좀 해봐. 전에 일본 청년 하나가 이곳에 묵은 적이 있어. 그 전까지 내가 상상하는 일본은 고요하고 여유롭고 뭔가 말 그대로 동양적인 여백이 있는 삶을 사는 그런 나라였는데 그 청년 말이 경쟁 치열하고 바쁘고 정신 없고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자 취급이나 당한다지 뭐야. 정말 놀라웠어. 한국은 어때?”
“한국도 비슷해요. 좋은 학교 나와야 하고 좋은 회사 다녀야 하고 좋은 배우자 골라 결혼해야 하고 그렇게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그 아기를 또 그렇게 키워야 하고. 그러니 아기 키우려면 돈 많아야 하고, 주류에 속해야 하고, 낙오되지 않아야 하고. 그거 알아요? 한국처럼 보수적인 사회도 별로 없어요. 문신도,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도, 결혼 전에 동거를 하는 것도 다 터부시 돼요.”
“뭐라고?”
“전 오래 전부터 예쁜 문신 하나 하고 싶었는데 시어머니 충격 받으실까 무서워서 못하고 있어요. 담배도 그래. 만약에 아줌마가 대로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길가는 할아버지나 아저씨들이 호통을 칠 거예요. 진짜로요. 그리고 남편이랑 저는 결혼하기 전에 몇 년 동안 함께 살았는데 그때 같은 회사 다니던 동료들에게조차 비밀이었어요. 진실을 말했다가는 낙인이 찍히는 거야 그 순간.”
“도대체 왜?”
“글쎄요. 그게 다 남들 눈을 많이 의식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만약에 여자가 남자랑 동거를 했다가 헤어지잖아요? 그럼 그 여자는 다른 남자 만나서 결혼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렇고 그런 여자라거나 헤프다거나 기타 등등의 꼬리표를 다는 거예요. 문신도 깡패들만 하는 뭐 그런 것이라는 인식이 아직 팽배하고, 담배는 남자만 피는 담배를 어디 감히 여자가 였는데, 요즘은 담배 자체가 워낙 해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남자든 여자든 하여간에 담배를 피면 다 죄인 취급 받기는 해요. 여하간 이런 것들이 다 진심으로 싫은데도 결국에 저도 한국에서 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숨어 들어 살고 있어요. 동거했던 것 말 안 했고, 회사 다닐 때는 상사들 몰래 숨어 담배 피웠고, 하고 싶은 문신도 결국에 안 하고 있잖아요. 결혼식도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남들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어요.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바보 같아. 결혼식이라는 것이 무슨 거래처럼 되어버려서 내가 낸 축의금 회수한다, 뭐 이런 게 있어요.”
“아니, 돈을 회수한다는 게 무슨 소리야?”
“보통 살면서 세 번의 큰 일이 있어요. 돌잔치, 결혼식, 장례식. 만약에 아줌마 친구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이 되면 선물을 사 주거나 축하금을 보내야 해요. 그게 보통 100달러. 결혼식도 그렇고, 장례식도 그렇고.”
“세상에나, 나는 정말 한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나 봐. 그럼 돌잔치에 돈으로 선물을 하지 않고 뜨개질로 양말이나 뭐 그런 거 떠 주면 안 되는 거야?”
“양말은 너무 약소한걸요. 만약에 아줌마 친구가 아줌마 딸 돌잔치에 100달러를 보냈다면 아줌마도 그에 상응하는 금액이나 선물을 보내야 해요. 안 그럼 친구 사이 금 가요.”
“영국에서도 결혼식엔 돈으로 선물을 대신하기도 해. 물론 선물을 하는 게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헌데 말이야, 장례식에 갈 때도 돈을 내야 한다고? 정말 그런 얘기는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본다.”
“장례식을 하려면 돈이 꽤 들어요. 장례식장도 빌려야 하고 문상 온 손님들 음식도 대접해야 하고, 관도 좋아야 하고, 매장 하지 않고 화장한다면 그 유골 담는 항아리도 좋아야 하고, 참, 수의도 굉장히 비싸요. 그래서 어떤 부모님들은 자식한테 부담 지우기 싫어서 미리 본인 장례식 비용 준비해 두시는 분들도 있어요. 부모 장례식 후지게 치렀다가 자식들 욕 먹을까 봐요. 자식 부담 덜어주려는 이유도 크고요.”
“잠깐, 수의가 비싸다는 게 무슨 소리야? 죽으면 땅에 묻히든 불에 태워지든 하는 거잖아.”
“수의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에요. 천연 삼베로 유명한 장인이 만들면 몇 백만 원에서부터 몇 천만 원까지도 하고, 가짜 삼베로 만들면 몇 만 원 이런 것들도 있대요.”
“그럼 뭐야.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죽은 사람 수의 만져보고 ‘흥! 이건 가짜군!’ 이런다는 거야?”
맨디는 마치 죽은 사람의 옷을 손으로 슬쩍 만져보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옆집 할머니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 우리의 웃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맨디와 나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여기 와서 친하게 지내던 이웃 영감이 있어. 혼자 살았고 나이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일흔 몇 살 정도. 작년 겨울에 그 영감이 우리 집에 들러 차 한잔하고 갔는데 그 이후로 통 보이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이 집에 찾아갔지. 가 보니 혼자 죽어 있었대. 이웃들이 모여 그 영감 장례를 치렀어. 그러니까 그때가 마크와 내가 불가리아에서 경험한 첫 번째 불가리아의 장례식이었던 거야. 어땠냐고? 그 영감 죽을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천에 둘둘 싸서 공동묘지에 묻었어. 작년 겨울은 정말 욕 나오게 추웠는데 말이야, 왜, 장례식 할 때 보면 묘지 앞에서 신부님이 송가를 부르잖아. ‘♩하~~~나~~~~아~~~~님~~~~의~~~~품~~~~~으~~~~로~~~~~~돌~~~~아~~~♩’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근데 그날은 신부님도 정말 추웠는지 ‘♬하나님의품으로돌아가@#$#!#$!#%!#%!@#%♬’ 이렇게 엄청나게 빨리 부르더라고. 마크랑 나랑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그리고 나서 그 영감네 집에 모여 각자 준비해 온 간식들 (거창한 거 아니고 그냥 마트에서 파는 과자나 뭐 그런 거 있잖아) 나눠 먹고 끝이었어."
루마니아의 수도 부큐레슈티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루세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호스텔 마당에 앉아 맨디와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기껏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찾아간 버스터미널의 매표소는 하필이면 내가 도착했을 때 이제 막 점심 휴식시간이 시작된 참이었다. 꼼짝없이 대합실 주변을 맴돌며 한 시간 반을 기다린 후, 휴식시간을 끝내고 돌아온 매표소 직원이 창구의 구멍을 막아 놓았던 골판지를 치우자마자 부큐레슈티행 버스에 대해 물었다. 기운 빠지게도 버스의 자리는 오전에 이미 다 팔리고 없었다. 같은 대합실 안에 있는 다른 버스 회사를 찾아가 물으니 그곳에는 자리가 있었다. 지난 한 시간 반 동안 문을 열고 있던 사무실이었다. 어쨌거나 버스표를 구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인데도 부아가 치밀었다. 호객꾼과 매연을 참으며 보낸 헛된 시간과 맨디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의 답답함, 그리고 내가 불가리아의 끝에 와 있다는, 그러므로 곧 있으면 이 여행도 끝이 난다는 사실이 더해져 나의 기분은 정말이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하여 다뉴브 강변을 향해 난 길을 걸으며 울퉁불퉁 성가시게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수도 없이 발이 걸릴 때마다 나의 마음도 함께 걸려 터실터실한 보풀이 잔뜩 일고 말았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멈추더니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차 안에 노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이 말했다. “부큐레슈티?” 부큐레슈티로 가는 길에 사람을 태워 기름값이라도 벌어보려는 것이리라. 키르기즈스탄의 탐치에서 남편과 이식쿨 호수를 향해 걷고 있을 때도 이들과 꼭 닮은 노부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비쉬켁?”이라고 물었는데.
터미널에서 다뉴브 강변 까지는 삼십여 분이 걸렸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다뉴브강이었다. 알프스 북부, 독일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를 거쳐 우크라이나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다뉴브. 알바나이에서 만난 폴란드 친구 아시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있지, 나의 여행은 언제나 다뉴브에서 시작해서 다뉴브에서 끝난다는 거야."
인도차이나의 메콩강 같은 존재일까? 강가에 서니 기분이 좋아졌다. 파란 하늘에 걸린 동그란 구름,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강 건너에는 루마니아가 있었다. 까치발을 들어 오랫동안 루마니아를 굽어본 후 뒤를 돌아보니 한 커플이 나란히 손을 잡고 난간에 서서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말 없이 다뉴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의 그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서 있냐고.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루마니아에서 왔어요. 저기, 저곳이 우리나라예요.”
벅찬 듯한 그들의 표정이, 그 미소가 나를 다시 설레게 만들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도를 펼쳤다. 비로소 루쎄라는 도시가 궁금해진 것이다. 일곱 개의 릴라호수에서 내려오던 길, 체어 리프트에 함께 앉았던 레니의 고향이 이곳이라고 했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만,
“루쎄에는 아무것도 없어. 일자리도 뭣도 아무것도.”
론리플래닛은 루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불가리아에서 가장 우아한 도시 중 하나, 불가리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중부 유럽의 웅장함을 가진 곳.’
그들이 말한 중부 유럽의 웅장함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루쎄는 그동안 보았던 불가리아의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확 트인 도시는 평평했고 도로는 넓었으며 한 블록이 굉장히 넓었다. 건물들은 하나같이 크고 길며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닮은 듯 보였다. 비엔나에 비해 건물 외벽의 페인트가 조금 더 벗겨졌고 때가 조금 더 묻어 있었지만. 루쎄 역시 발칸의 도시답게 한창 환경 미화 중이어서 보행자 도로며, 광장이며, 분수며, 차도며 어디 한 군데 망치질을 하고 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사가 끝난 후에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화장 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추하지 않게, 모나지 않게, 티 나지 않게, 그렇게 예뻐지기를.
마크가 말했다.
“이곳에서 평생 살 거야. 영국은 말이지, 정말로 다 썩었어.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어. 아주 엉망이야. 우린 절대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아.”
남들은 가지 못해 안달인 그 영국을 버린 두 영국인을 발칸의 청춘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맨디가 먼저 잠자리에 든 어느 밤, 마당에 앉아 마크와 시간을 보낼 때 그가 말했다.
“맨디는 정말 특별해. 단 한 번도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언제나 침착하고 언제나 슬기롭지. 호스텔에 오는 손님들이며 이웃들이며 모두 다 그녀를 좋아한다니까. 그녀는 누구와도 정말 잘 지내는 그런 사람이야. 게다가 못하는 것도 없어. 모든 걸 다 할 줄 안다고. 바느질, 뜨개질은 말할 것도 없고 치즈도 만들고 요거트도 잘 만들어. 농사일도 정말 잘해. 예전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여기저기에서 살았는데 그때 그녀 혼자 돼지 육십 몇 마리를 돌봤었대. 아, 맨디는 정말 대단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한동안 맨디의 꿈을 꿨다. 호스텔의 작은 마당과 한낮의 더위와 차가운 수돗물과 바스락거리는 잎담배가 등장했다. 루쎄에서 그랬듯 나는 꿈에서도, 내가 바라는 삶을 현실에서 살고 있는 그녀를 선망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면 침통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와 행동 앞에 나의 핑계와 변명이 숨을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했던, 내가 무엇을 해야 즐겁고 행복한지에 대한 대답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살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 조바심의 근원은 언제나 돈과 타인의 시선이었고, 불안감을 극복하기에 나는 너무도 얄팍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더 이상 그녀도 루쎄도 꿈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