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발칸
1. 유진
유진을 만난 것은 남편을 마중하러 공항으로 가던 길에서였다. 유니리 광장 이곳 저곳에 규칙 없이 흩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 사이에서 공항 행 버스를 찾아냈을 때는 누렇고 거대한 태양이 그보다 더 누렇고 거대한 인민궁전 너머로 막 사라진 뒤였다. 나는 어둠침침한 땅거미 속에서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버스들을 이리저리 기웃거렸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버스에 앉아 있던 그의 여자친구 마리아가 유진을 밖으로 내보내 나에게 말을 걸게 한 것이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고.
나는 남편에게 빚이 있었다. 나의 부재로 그가 느꼈을 외로움과 그가 겪었을 불편을 모를 리 없었다.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어 집개의 밥을 챙겼을 것이고 싫다고 도망가는 개를 달래어 얼굴을 빗겼을 것이다. 불 꺼진 집에 돌아와 서투른 실력으로 밥을 지었을 것이고 매번 비슷한 반찬을 앞에 두고 뉴스를 보며 말없이 밥을 먹었을 것이다. 매주 일요일 시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야 하는 시간이 오면 이번 주는 또 뭐라고 둘러대나 고민했을 남편.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괜찮다고, 잘 있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걱정 말라고 대답했지만 초월적인 그 대답에도 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러니 지난 두 달 동안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 것은 비단 더럽고 헤진 배낭의 무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루마니아 최고의 아름다움이 뭔지는 몰라도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그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의 짐을 한 수저 덜어낼 수 있다면. 그의 배려와 희생을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보상이지만 내가 그곳 루마니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이었다. 그러니 그간 여행했던 여섯 나라를 합한 크기의 루마니아와 그 넓은 땅 사방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must go', 달랑 일주일의 시간, 그리고 내가 집을 나온 이후 오늘 만을 기다렸을 남편과의 만남을 앞두고 나는 꽤 초조해지고 말았다. 나중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때 그리 조바심 낼 필요는 없었다. 루마니아에는 내가 지난 두 달 동안 발칸에서 보았던 모든 아름다움이 집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더 밀도 높게 응축된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그것을 알 리 없던 나는 정말이지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라고.
“공항버스는 어디까지나 다 전시용이야. 깨끗하고 신식이잖아? 부쿠레슈티 시내버스 중에서 유일하게 이것만 이렇게 좋아. 왜긴, 전시용이라니까. 공항버스 말고는 모조리 다 낡고 더러워. 시간표 따위는 있지도 않고. 네가 오늘 구경했던 부쿠레슈티 역시 극히 일부에 불과해. 차우세스쿠가 도심에 살던 사람들을 다 내쫓고 새 건물을 짓고 도로를 넓히고 공원을 만든 건 알고 있지?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말도 못하게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추하다고.”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표를 사러 공항에 간다는 유진의 직업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무슨 프로그래머가 비행기표를 사러 공항에 가? 컴퓨터는 뒀다 게임만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우리 둘 다 신용카드가 없어.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살 수가 없어.”
루마니아에 어제 도착했다는, 앞으로 만나게 될 부쿠레슈티 밖 루마니아가 기대된다는 내게, 유진은 루마니아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의 루마니아 이야기를.
차우세스쿠 정권이 국민들에 의해 무너진 이후 그가 망쳐 놓은 나라를 되살리려는 이런저런 노력이 있었지만, 유진과 마리아에게 그들의 조국은 거지같았다. 일자리는 언제나 부족하고 임금은 턱없이 작으며 EU 가입 이전에도 높았던 물가는 가입 이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으로 건너갔다. 루마니아 근로자의 임금은 대략 350유로 정도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서유럽에서는 천 유로 정도는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진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서유럽으로 간 사람들은 말 그대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며 노예처럼 일을 하고 있다는데, 번 돈을 가지고 루마니아에 돌아와 그럭저럭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기나 도박 등에 빠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했다. 돈은 언제나 그렇듯 늘 모자랐다. 은행의 저리 대출이 부자들에게만 문을 열고 있는 것은 한국이나 루마니아나 마찬가지였다. 돈 없는 그들이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곳은 고리의 사채뿐인 것이 현실이라 지금의 체제 안에서는 한 번 씌워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불행히도 이 젊은 커플의 가족 중에는 서유럽에서 돌아와 사기를 당한 사람도 있고, 사채를 쓰다 갚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들은 빚의 연대 책임으로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었고, 신용카드가 없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들에게는 영국이나 네덜란드로 건너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꿈이 있다고 했다. 사실 루마니아가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 좋다고 그들은 말했다. 한 번도 루마니아 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마리아는 오랫동안 루마니아 밖으로의 여행을 원했지만 그녀의 형편으로는 그 역시 그저 꿈에 불과했다. 남편과 나는 부쿠레슈티를 떠나 루마니아를 여행하면서, 그 광활하고 다채롭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땅을 ‘관광’하면서, 내내 유진과 마리아를 떠올렸다. 루마니아가 아닌 다른 어딘가는 과연 어디일까...
부쿠레슈티 북쪽에 위치한 공항까지 버스로 50분이 걸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유진 커플은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듯 나를 이끌었다. 남편의 도착 시간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우리는 다 함께 유진의 비행기표를 알아보러 TAROM항공의 창구를 찾았다. 하지만 온라인을 통해 미리 예약을 한 후 공항 창구나 시내에 있는 항공사 사무소에서 결제할 수 있다는 맥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공항에 오느라 비싼 버스 요금만 낭비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볼일이 소득 없이 끝난 후 나는 그들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혼자서 남편을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안심할 수 없었는지 나를 도착 층으로 안내했다. 도착 층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앉을만한 의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유진이 말했다.
“보라고, 이게 말이 돼? 겉모습만 멀쩡하게 지어 놓고 의자 하나 없는 공항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이게 바로 루마니아야.”
꼼짝없이 삼십여 분을 서서 우리는 남편을 기다렸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남편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으면 한걸음에 달려가 반갑게 맞을 생각이었는데, 나는 그만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편은 두 달 전 인천공항에서 나를 보낼 때와 같은 얼굴로 커다랗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자기!”
우리 넷은 신식 공항버스를 타고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부쿠레슈티의 관광객 물가와 비싼 밥값에 불만을 토로하는 내게 유진은 그들의 단골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싶어 했는데, 이스탄불을 거쳐 오랜 시간을 날아온 남편이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서운해하는 그들 이상으로 나도 서운했지만, 여행에서의 인연이 대부분 그렇듯 유진과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몇 차례 안부 이메일을 보냈는데 그로부터 어떠한 답장도 받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바라던 대로 루마니아를 떠나 루마니아가 아닌 다른 곳 어딘가에 있어서, 그래서 답장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2. 지하도시.
'작은 파리’ 부쿠레슈티. 레바논의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 러시아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린다. '파리'는 동경과 칭송의 대상이 분명해 보인다. 하나 나는 파리에 갔을 때 백화점 구경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몽마르뜨도, 노트르담 대성당도 보지 못했다. 배움에 때가 있다고 했듯이 여행에도 때가 있다는 생각이다.
허탕 친 것과 상관없이 부쿠레슈티가 마음에 들었다. 새로 얻은 지도에 X자를 그리며 가보라는 곳 하나하나 찾으며 길을 걸었다. 나는 이런 것을 몹시 좋아한다.
2014년은 부쿠레슈티가 생긴지 555주년이 되는 해라고 했다. 루마니아 국기색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거리 곳곳에 놓여 있었는데 해가 바뀔 때마다 숫자를 고친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국립대학도서관이고 그 앞에 있는 기마 동상은 카롤 1세이다. 그는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 전쟁 당시 루마니아의 승리를 이끈 독일의 왕자인데 그 공을 인정받아 외국인임에도 루마니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차우세스쿠는 그의 집권 시절 카롤 1세의 동상을 ‘녹여’ 레닌의 동상을 만들어 같은 자리에 세웠고,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지자 바뀐 정부는 다시 레닌을 '녹여' 지금의 동상을 만들었다. 하여간 루마니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모두 차우세스쿠로 시작해서 차우세스쿠로 끝났다.
마카-빌라크로쎄 아케이드. 안쪽 건물을 에두른 바깥 건물과 두 건물 사이를 덮은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다가와 건물의 역사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곳은 최초의 주식 거래소였는데 그것이 이사 간 후로는 카페 골목으로 불린다고.
친구들을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바로 앞 카페로 들어갔다. 이들은 모두 부쿠레슈티에 사는 터키 청춘들. 조금 더 보태자면 부쿠레슈티에 사는 터키 부자 꼬맹이들.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고 음료수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이들의 나이는 13세에서 19세 사이로 모두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른쪽의 여자아이가 뭐라도 마시라며 메뉴판을 내게 건넸는데 가장 싼 메뉴인 생수값이 내가 평소 쓰는 밥값보다 더 비쌌다.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 몫을 내려고 하자 터키인들답게, 무슨 소리냐며, 너는 우리의 손님이라며 돈을 내지 못하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영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여자아이는 방년 15세로, 그녀가 피는 말보로 한 갑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 5천 원 정도. 나의 여행에 대해 물어보길래 불가리아에서 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더니, 한 아이로부터 그 가난한 거지 나라는 뭐 하러 갔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꼬맹이들.
차우세스쿠는 종교를 금지시켰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를 따른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신이 되려 했다. 본디 신은 하나여야 하는지라 교회가 눈에 보일 때마다 그것을 허물게 했다. 다행히 그의 밑에 정신이 똑바로 박힌 건축가가 있어 그를 말렸다. “각카,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래? 그럼 눈에 안 띄게 어디 딴 데 갖다 치워.” 건축가는 고심 끝에 교회의 밑동을 잘라 글자 그대로 교회를 ‘통째로 들어 올려’ 다른 곳으로 옮겼다. 통째로 옮길 수 없을 때는 ‘잘라서’ 옮겼다. 그는 총 열세 개의 교회를 옮겼는데 ‘이사’ 도중 손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호스텔 직원에게 싸고 맛있는 로컬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관광객으로 붐비며 가격도 비싼 이곳을 알려 주었다. Caru cu bere. 1860년대부터 영업한 유서 깊은 곳이지만 이렇게 왁자지껄한 곳에 혼자 앉아-혼자 앉을 자리를 내준다면-밥을 먹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다. 그러고 보면 내가 묵었던 호스텔의 직원들은 이래저래 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를테면, 하루 만 원짜리 도미토리에 묵는 손님이 ‘맛있는 떡볶이집 좀 알려 주세요.’라고 부탁했는데, 최상급 한우와 유기농 재료만 취급하는 궁중요리 전문가의 식당을 소개한 꼴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맛있는 길거리 떡볶이였는데 말이다.
이상한 것은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바로 뒤에 항상 같은 생각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내가 호스텔을 차리면...' 얼마 전 단양에 갔다가 시어머니 댁 동네에 아주 예쁜 단독주택을 보았다. 너른 잔디가 깔린 마당과 견고하게 올린 낮은 돌담, 그 위로 탈 듯 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단층 짜리 벽돌집이었다. 그 집을 보자마자 ‘아, 저 집은 얼마나 할까, 호스텔을 차리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이것도 병이다.
나의 여행처럼 발칸의 여름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호스텔 앞을 흐르는 담보비챠강. 부쿠레슈티는 이 도시에 처음으로 정착한 양치기의 이름에서 유래했고-부쿠(양치기 이름) 레슈티(나는)- 담보비챠는 양치기 아내의 이름이라고 했다. 강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라 물고기는 살지 못한다고.
산책길에 우연히 같은 방에 묵고 있는 안젤라를 만나 함께 걸었다. 그녀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역시나 거지 같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 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 살지만 여전히 ‘중국식’으로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부모 집으로 들어갔다고. "돈도 못 버는데 당연하잖아?" 중국이나 일본 여행자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공통분모도 꽤 많기 때문이다. 스노우글로브를 스노우볼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거나 뭐 그런 사소한 거지만.
루마니아는 EU 회원국 중 불가리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지만 내가 여행했던 발칸 나라 중에서는 가장 부자 나라였다. 하여 체감 물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꽤 높아서, 자판기 커피에서부터 기념품까지 가격을 볼 때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안젤라와 함께 몇몇 레스토랑을 기웃거렸는데 머릿속으로 계산기만 두드리다 돌아선 후 패스트푸드 치고는 사악한 돈을 내고 시시한 피타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맛없는 그것을 먹으며 지난 두 달은 이제 그만 잊고 루마니아에 적응하리라 다짐했지만, 막상 부쿠레슈티를 떠나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는 물가에 대한 불만이 생기지 않았다.
Romania라는 이름의 뜻은 ‘로마인이 사는 땅, 로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땅’이지만 막상 로마와의 인연은 2~3세기 사이 160여 년 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 전부이다. 이후 슬라브, 고트, 불가리안, 헝가리안의 지배를 받았고, 15세부터 19세기 중반까지는 오스만 아래 있었다. 그럼에도 국명에 로마를 끌어 넣은 이유는 서유럽, 특히 로마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 한다. 루마니아어는 라틴어에서 분화된 로망스어 중 하나로, 로망스어는 로마제국의 일반 대중이 사용하던 라틴어가 오랫동안 서서히 변형되다가 통일성을 잃은 채 서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몇 개의 방언을 통틀어 일컫는다. 프랑스어, 이태리어, 에스퍄냐어, 포르투갈어, 프로방스어, 카탈루냐어, 알프스 지방에서 쓰이는 레토로망스어, 하다못해 지중해 한가운데 섬 사르디나어도 루마니아어와 함께 로망스어에 속한다. 루마니아어는 지리적 위치 탓에 다른 로망스어로부터 고립되었고, 주변의 슬라브 언어권과 인접한 탓에 슬라브 계통의 어휘를 다수 받아들였지만, 근대에 들어서 슬라브성을 배격하고 라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태리어와 불어에서 다수의 어휘를 차용해 왔다. 국립 역사박물관 계단의 이 동상은 로마 건국의 영웅이자 초대 왕인 로물루스와 그를 키웠다는 늑대로, 동상 작업을 위해 한참 동안 쳐 놓았던 장막이 걷히고 시민들에게 동상이 공개되자 실망을 넘어 조롱거리 신세가 되었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데리고 나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 한동안 유행했다고. 동상 하나로 루마니아의 정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루마니아 사람들의 유머 감각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다음날,
유니리 광장 공원의 시계탑 앞에서 10시에 시작되는 무료 워킹 투어에 참여했다.
지난 저녁 겉에서만 구경했던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
작지만 예쁜 교회였다. 오래된 나무가 중정에 드리운 푸른 그늘 아래서 안뜰 한구석에 놓여 있는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가이드는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넓은 도로인 유니리 거리를 만들기 위해 부순 다른 교회들의 잔해라는 설명을 보탰다.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된 투어는 부쿠레슈티의 주요 볼거리를 거쳐 오페라 하우스에서 끝을 맺었다. 투어가 하도 재미있어서 그것에 집중하느라, 그리고 전날 혼자 산책을 하며 구경했던 장소들과 겹쳐 사진은 찍지 않았다. 이 투어를 통해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세스쿠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년의 집권 기간 동안 그의 행적이 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당시 고통받았던 루마니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빠진 루마니아는 꽤 심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적어도 그를 제대로 ‘씹을’ 수 있는 루마니아 사람들이 부러웠다. 다음은 투어 중 들은 이야기 하나.
생필품이 모자라 배급을 하던 시절, 장장 몇 시간 동안이나 달걀을 배급하던 배급원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는 배급 줄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망할 놈의 차우세스쿠! 내가 죽여 버리겠어!!”
라고 외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어깨가 축 처져 돌아왔다. 달걀을 배급 받으려고 여전히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배급원 주위로 몰려들어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죽였어? 죽였어?”
배급원이 말했다.
“그 새끼 죽이러 갔는데, 거긴 여기보다 줄이 더 길더라고.”
생방송으로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우세스쿠는 그의 부인과 함께 총살되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가이드 미키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우렁차고 또박또박한 목소리, 모두를 사로잡는 유머감각, 해박한 지식, 거기에 예쁜 미소까지. 프로그램 자체도 짜임새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도시에서의 워킹 투어와 달리 참가자 중 누구도 딴짓을 하지 않았다. 무료로 받기는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투어였기에 투어가 끝난 후 그녀의 배낭 안은 사람들이 건네는 기부금으로 가득 찼다.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라고 그녀에게 물으니 점심 먹을 식당, 오후에 있을 인민궁전 투어, 점심과 투어 사이에 시간을 보내면 좋을 공원까지 알려주었다.
우루과이, 슬로베니아, 터키에서 온 여행자들과 함께 인민궁전을 구경했다. 인민궁전은 개별적으로는 관람할 수 없고 반드시 가이드를 따라 움직여야 하며, 입장권을 살 때는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입장료 또한 비싸서 성인요금 25레이, 26세 미만의 학생요금 13레이. 사진을 찍으려면 30레이를 추가로 내야 했기에 우루과이가 대표로 샀다. 입장권을 사는 절차도 좀 복잡해서 체크 포인트가 여러 곳 있었는데, 아무 여자에게나 농담 걸기 좋아하는 우루과이 아저씨가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매표소 여자 직원에게 학생 할인을 해 달라며 면허증을 학생증이랍시고 꺼내 농담을 건넸고 매표소 직원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학생증이 있어도 나이가 26세가 넘으면 학생 할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화기애애한 상황에서, 그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나는 유효기간이 한참이나 지난 학생증을 살짝 꺼내 보였는데, 농담을 하느라 정신이 팔린 매표소 직원은 그것을 슬쩍 보더니 내게 학생 표를 내주었다. 기뻤다. 하지만 이런저런 불편과 비싼 요금을 떠나 인민궁전의 투어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서 몇 번째로 긴 카페트나 대단한 무게를 자랑하는 몇 톤짜리 샹들리에 따위를, 지칠 대로 지쳐 날카롭기까지 한 가이드의 성의 없는 설명을 들으며 구경한 것이 전부였기에, 오전에 참가했던 무료 투어와 비교되어 우리 모두 꽤 시큰둥했다.
1980년 평양을 방문한 차우세스쿠는 평양과 김일성으로부터 대단한 영감을 받고 돌아와 인민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이만오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오 년 동안 밤낮으로 매달렸지만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사는 중단되었다.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 단 한번도 건물 전체가 다 사용된 적이 없는 건물, 최소 이천 개 이상의 방이 비어 있는 건물.
냉전이 끝나고 화해의 시대가 시작된 90년대 초, 마이클 잭슨이 역사적인 공연을 앞두고 이곳 발코니에 섰다. 그를 보려고 모인 수 만 명의 부쿠레슈티 시민들에게 그가 한 인사. “헬로,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를 헛갈려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도 꽤 있어서, 몇 년 전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를 보러 삼백 명이 넘는 축구팬들이 부쿠레슈티로 와서는 경기장이 어딨는지 물었다고.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거리의 이름은 유니리로, 어느 날 차우세스쿠가 부하에게 “유럽에서 가장 큰 거리가 어디지?”라고 물었다. 부하는 “샹젤리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차우세스쿠가 명령했다. “그럼 그것보다 더 큰 길을 만들도록!” 유니리는 샹젤리제보다 1m 더 넓게 지어졌다. 도로 건설을 위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외곽으로 쫓아내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는 믿을 수 없는 내용 일색이었다. 집을 비워줄 수 없다고 버티는 경우에는 사람이 집안에 있는 상태에서 집을 들어 올렸다거나, 새 집이라며 정부가 마련해 놓은 아파트에 이사를 가보니 골조에 시멘트만 발라져 있는, 문도 없고 창문도 없고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이었다거나 등등. 이 모든 이야기는 미키에게 들었다.
스페셜 여권과 파파의 돈으로 여행 중인 터키의 멜리케, 두브로브닉이 몬테네그로의 도시라고 우기던 슬로베니아의 이보, 원월드 세계일주 항공권으로 여행 중인 우루과이 아저씨 세르지오.
그리고, 우리가 하루 종일 웃고 떠들며 걸었던 이 도시 아래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