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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May 06. 2016

[13]언덕 위에 '언덕 위의 도시'가 있다_루마니아.

1부-발칸

브라쇼브를 떠나 북서로 향했다. 빽빽한 숲을 지났고 산 하나를 넘으니 느닷없이 드넓은 평원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트란실바니아 평원이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눈이 시큰거리도록 하늘은 푸르렀고 우리 머리 위에 한가득 흩어져 있던 뭉게구름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모여 조각보 밭을 쓰다듬고는 바람에 흩어졌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고 순식간에 마을을 스쳐 그 다음 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또 다시 오랫동안 평원이 펼쳐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슴 속에 담아 놓고 그리워하는 루마니아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시기쇼아라는 루마니아에서 단일 도시로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벼락치기 공부를 해 온 남편의 지도에 ‘중세 작은 도시’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GPS가 시키는 대로 시기쇼아라의 성문을 지나 역사지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의 차는 구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마침 근처에 있던 경찰관에서 길을 물으니 사무적인 태도로 GPS가 가라는 방향을 가리켰다. 좌회전. 


숙소를 구하는 것은 렌터카 여행이라고 해서 배낭 여행과 다를 것이 없었다.

1. 인터넷에서 한 두 곳 미리 골라 놓고

2. 어렵게 찾아가(매번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3. 빈방이 있는지 물은 다음

4. 방을 보고

5. 가격을 흥정한다.


덜그럭 덜그럭 돌길을 지나 호텔이 있다는 좁은 골목 어귀에 차를 세웠다. 길을 막고 있으니 행여 다른 차가 나타나면 곤란해질 형편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서 남편과 자주 싸우고는 했다. 우리는 서로 상대의 태도가 너무 느긋하다고 혹은 너무 조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기에 상황의 긴박감이 더해져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에서 원만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요령을 터득한 것은 고맙게도 함께 한 시간 덕분이란 생각이다.


호텔 주인 마리우스는 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그가 가진 빈방을 모조리 구경시켜 줄 만큼 건장하고 활기찬 노인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서로에게 막 입을 떼려고 하면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빈방이 있나 물어보러 들어간 마누라가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 남편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그렇다고 전화기를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시간의 통화를 끝낸 마리우스는 오늘 밤 단체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통화 내용을 내게 공유하는 것으로 양해를 대신했다. 나는 이층 끝 비스듬한 천장에 하늘로 난 창이 있는 큼지막한 방을 골랐다. 루마니아 여행이 즐거웠던 수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깨끗한 숙소를 믿지 못할 만큼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넓고 빛이 잘 들었으며 청소 상태가 훌륭했고 샤워기가 욕실 벽에 제대로 잘 매달려 있었다.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의 지배 하에 있던 12세기, 헝가리 왕은 색슨(작센)족 장인과 상인들에게 저 아래 남쪽 사람들이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지금의 시기쇼아라에 도시를 만들어 지키게 했다. 도시는 언덕 위 성채와 언덕 아래 트르나바 강변에 지어졌는데 언덕 위 성채 안의 집들은 협소한 부지 탓에 조밀한 형태로 지어졌고 성채 밖 집들은 언덕의 경사면에 흘러내리듯 자리 잡았다. 색은 다르지만 한결 같은 색조로 칠해진 앙증맞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을 걸으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외벽에 페인트를 칠할 때 반드시 섞어야 하는 흰색 페인트의 양이 정해져 있을까? 아니면 도시 전체의 페인트칠을 도맡아 하는 페인트공이 있을까? 


이주민들의 직업이 말해주듯 시기쇼아라는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수 세기 동안 트란실바니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성채에는 길드에 의해 방어 목적으로 세워진 14개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지금은 9개의 탑이 남아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탑의 이름이 탑을 짓고 관리했던 길드에서 따 왔다는 것이다. 무두쟁이, 밧줄 제작자, 신발 제작자, 보석상, 열쇠공 등등의 탑. 더 재미있는 것은 거리에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마리우스에게서 받은 지도를 보면 우리가 묵은 호텔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신발 제작자의 탑’ 앞 ‘목수 거리’와 ‘담벼락 거리’ 끝에서 세 번째 건물, ‘시계탑’에서 찾아올 때는 ‘성채 광장’에서 ‘중노동 거리’를 지나 좌회전 후 ‘목수 거리’로 들어오면 오른쪽 세 번째 건물’


우리는 ‘담벼락 거리’를 따라 ‘양복장이 탑’, ‘방직공 탑’, ‘모피 제작자 탑’, ‘도살업자 탑’을 구경한 후 17세기에 지어진 ‘학생 계단’을 통해 성채 가장 높은 언덕에 올랐다. 언덕 위에는 ‘언덕 위의 교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교회가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 옆에는 ‘아주 오래된 학교’라는 이름의 아주 오래된 학교도 있었다. 175개의 '학생 계단'을 기어 오르며 올망졸망하고 알록달록한 요새 도시 전체를 내려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언덕 위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무성한 나무들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교회를 지나쳐 교회의 뒤편으로 나가니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묘지가 층층이 만들어진 계단식 논처럼 경사진 비탈을 따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짙은 나무를 헤친 빛줄기가 오래된 묘비 위에 따사롭게 내려앉았고 젖은 낙엽 냄새를 안고 불어온 미풍에 묘비 사이사이 웃자란 잡초들이 부드럽게 춤을 추었다. 시기쇼아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곳이었다. 온갖 색으로 치장한 산 자의 마을 위에 온통 흙빛뿐인 죽은 자의 무덤.



성채의 서쪽 ‘밧줄 제작자의 탑’의 성벽을 따라 언덕을 내려왔다. 성채는 정말이지 아담해서 지도를 보고 건물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끝에서 끝까지 300미터는 되려나 싶었다. 우리는 ‘계단 거리('학생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다)’와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있는 ‘오리 새끼 광장’을 지나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는 드라큘라의 모델 체페슈의 생가를 슬쩍 보고 시계탑으로 향했다. 시계탑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근사했다. 나지막한 집들뿐인 좁은 골목을 나와 갈림길에서 이쪽 저쪽 고개를 돌렸는데 느닷없이 저 앞에 우람한 시계탑이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수컷 공작새의 꼬리처럼 여러 색으로 조합된 시계탑의 지붕은 특히 아름다워서 투박한 탑의 몸통과 비교되어 더욱 돋보였다. 시계탑의 전망대에 올랐다.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발칸 여행을 통틀어 입장권을 사느라 쓴 돈이 아깝지 않은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사방으로 트인 전망대에 오르니 성채는 물론이고 성채 밖 도시의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를 흐르는 강, 강변의 커다란 교회, 그 교회 너머 동산 아래의 집들까지 모두 보였다. 우리는 전망대를 뱅글뱅글 돌며 경치를 구경하느라 서로를 몇 번이고 놓치고 말았는데 언제나 그렇듯 남편이 먼저 나를 찾아 나섰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날도 시계탑 위에서 수많은 집들을 내려다보며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집 한 채에 얼마나 할거 같아? 삼천만 원? 오천만 원?” 


탑에서 내려와 거리를 걷다가 불가리아 루쎄의 멘디네 호스텔에서 만난 로즈와 베키를 우연히 만났다. 영국에서 온 이 두 아가씨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회 초년생으로 달랑 일주일의 휴가로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시작해 루마니아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1,300km가 넘는 거리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은 없고. 맨디네 마당에서 환하게 웃으며 그녀들이 말했었다. “미친 짓인 거 우리도 알아.” 

젊은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들의 흥분과 열정이며, 늙은 사람들로부터는 꼰대 됨에 대한 경각이다.



시계탑 위에서 보았던 강가 교회를 찾아 성채를 나왔다. 성문 밖의 집들은 성 안의 것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은 흔한 경우였고 반쯤 무너진 집들도 종종 보였다. 해가 ‘언덕 위의 교회’ 뒤로 넘어간 터라 성 밖의 골목들은 더욱 음산해 보였다. 하지만 비탈길을 완전히 내려갔더니 도시는 다시 그 예쁜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마침 집시들이 저녁 볼일을 보러 대거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우리는 바짝 졸아야 했다.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그들은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이 벗은 코트를 한쪽 어깨에 걸치는 것처럼 커다란 비닐 봉지나 마대 등을 갖은 폼을 잡고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치켜 올린 턱이며 당당한 걸음걸이, 그리고 그 도발적인 눈빛까지 어디 하나 구린 구석이 없어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그들을 지나가길 기다렸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 마을을 걸었다. 저녁 시간을 앞두고 슈퍼마켓과 은행, 미용실과 옷가게가 있는 아랫마을은 꽤나 조용했다. 빵집도 문을 닫았고 거리는 더없이 한산했다. 우리는 트르바나강가로 갔다. 정교회 건물이 잘 보이는 다리 위에서 서서 여러 무리의 새들이 떼 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고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이 빛을 바라고 흩어질 때 즈음 성으로 돌아왔다. 해가 지자 언덕 위의 도시는 꽤나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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