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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Jan 31. 2016

[12] 보이지 않는 울타리_루마니아 브라쇼브.

1부-발칸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


1. 크로아티아에 한국 관광객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2. 산띠아고 순례길 걸은 한국인이 상반기에만 이천 명이 넘었대. 아니 도대체 왜?


어디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어 그동안 궁금해 죽겠는 걸 참고 참다 드디어 눈 앞에 한국 사람이 나타나자 지금이 기회다 싶어 다짜고짜 물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붙들려 받은 질문이 당황스럽고 그것에 희미하게 서린 비아냥조에 기분이 상했던 나는 “TV에 나와서.” “걷기가 유행이라.”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밤 자려고 침대에 누우니, 어렸을 때 친구와 말다툼을 한 후 집에 돌아와서야 채 못다 한 말이 생각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씩씩대며 분통을 터트렸던 것처럼, 크로아티아와 산띠아고에 대해 무언가 더 그럴싸한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억울해 애꿎은 이불만 발로 뻥뻥 차게 되었다. 잔뜩 신경질을 부린 후 다음번 기습 질문에 대비해 좀 있어 보이는 대답을 궁리하다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런 것이 필요하기는 한 것일까.  


남북전쟁이 끝나고 대공황이 있기 전까지 미국의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부를 축적한 미국인들은 앞다퉈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화려한 역사와 유구한 전통을 등에 엎은 유럽인들의 눈에 신생 국가 미국에서 온 졸부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고매한 구세계 유럽인들은 미국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그들을 천박하게 여겼고, 유럽 땅에서 보게 된 소수의 미국인들이 마치 미국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치부하였다. 예의범절의 여왕 에밀리 포스트의 ‘에티켓’ 등으로 무장한 미국인들이 1960~70년대에는 유럽을 넘어서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을 찾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지만, 비싼 카메라를 목에 걸고 허리에 힙쌕을 두른 ‘전형적인’ 미국인 관광객의 이미지는 유럽인들에게 여전히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제 중국이 미국의 바통을 건네받았다. 중국인 유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과거의 유럽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우리 땅에 들어와 돈을 쓰는 것은 양팔 벌려 환영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그렇다면 크로아티아와 스페인에서 온 그들의 눈에 우리는 한국판 유커였을까?


출처 : 위키


루마니아는 옛 공국의 이름을 따 현재까지도 크게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부른다. 북서부의 트란실바니아, 트란실바니아 남쪽 왈라키아, 그리고 동쪽 몰다비아. 루마니아 전체를 보았을 때 (이것은 물론 론리플래닛의 의견이지만) 몰다비아의 수체아바와 다뉴브 델타를 제외한 모든 볼거리들이 트란실바니아에 몰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광활한 트란실바니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카르파치아 산맥이 성과 도시와 사람과 소와 말과 간이화장실 뒤에 우뚝 서서 그것들의 풍경을 확실히 압도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루마니아 여행지 역시 시나이아를 시작으로 거의 트란실바니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트란실바니아는 오랫동안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지난 천 년간 자신들이 지배했던 영토의 2/3를 빼앗기는데, 지금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우크라니아의 일부, 슬로바키아 전체, 그리고 루마니아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트란실바니아가 포함되었다. 헝가리 친구 리타는 루마니아에 갈 계획이라는 나의 말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루마니아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야. 거기 절반은 우리 땅이었다고.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땅인데, 정말 말도 안되게 빼앗겼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나는 절대 가지 않아.”   


대학에서 불교학을 가르치고 넓은 시야와 현명한 판단력을 가진 사랑스러운 리타조차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영토 문제만큼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지 싶다. 헝가리 입장에서 보면 트란실바니아는 역사적, 민족적 의미에서 중요한 영토였다. 발칸 남부에 거주하던 루마니아인들이 트란실바니아로 유입된 것은 헝가리인들이 정착한 이후였고, 이 굴러 온 돌들은 대개 낮은 신분의 농민이었기 때문에 트란실바니아에 그들이 끼친 영향은 거의 없다는 것이 헝가리의 주장이었다. 하여간, 리타의 조상들은 헝가리 왕국의 남동쪽 끝이었던 트란실바니아에 12-3세기 독일인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만들게 했다. 헝가리의 지배 밖에 있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등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독일인들에 의해 건설된 세 개의 도시를 묶어 '작센(색슨) 트라이앵글'이라 부르는데 브라쇼브, 시기쇼아라, 시비우가 그것이다. 브라쇼브는 13세기에 건설되었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경계에 위치한 덕에 도시는 교통과 무역으로 급성장하지만, 정작 루마니아인들의 구시가 안에서의 거주는 독일인들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고 이는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현재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인구분포는 76%의 루마니아인, 20%의 헝가리아인, 그리고 나머지이다. 브라쇼브만 보면 루마니아인 91%, 헝가리아인 7%, 그리고 나머지 중 일부만이 독일인이다. 이래서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브라쇼브에 다다를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구시가에 있다는 여행자센터를 통해 숙소를 추천받을 생각이었다. 지도에 아리송하게 표시된 센터를 찾아 스파툴루이 광장을 몇 바퀴나 돌아야 했는데 간신히 찾아낸 센터는 오랜 기간 문을 닫은 모양새였다. 업무시간인 다섯 시 이전에 도착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헛수고를 한 셈이었다. 루마니아의 주차 시스템이 어찌 되는지 채 파악도 못한 상태에서 유료인지 무료인지도 알 수 없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었고, 오늘 밤 잘 곳이 없으며, 비가 그쳤다 내렸다 반복하고 있으니 어둠은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찾아올 터였다. 여행과 날씨의 관계는 여행과 여행 동반자의 관계보다 몇 배 더 중요하다. 동반자야 마음이 맞지 않으면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날씨는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구시가를 걸었다. 스파툴루이 광장 한쪽에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교회라는 '검은 교회'가 그 거대한 몸통을 골목 안에 숨기고 있었다. 14세기에 시작해 백여 년에 걸쳐 완성된 교회는 17세기에 있었던 대화재로 건물 외벽이 검게 그을려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빗물을 머금어 마치 잿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교회의 모습은 그 대단한 크기와 상관없이 꽤나 볼품없고 암울했다. 광장의 시계탑에서 근위병 교대식이 한창이었다. 체구보다 큰 유니폼을 입고 깃발을 어깨에 얹고 설렁설렁 건들건들 행진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흥미롭다. 광장에서 뻗은 골목길을 되는대로 걸었다. 파스텔톤의 오래된 건물들이 기념품 가게, 여행사, 카페 등을 품고 있는 모습은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지만 날씨만 좋았으면 이 또한 내가 상상했던 트란실바니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혼자였다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숙소도 구하지 못한 채 구경을 한다고 비 오는 도시를 돌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의 양상이 바뀐 것에 적응하기까지 하루 이틀 더 걸렸다.



트란실바니아는 ‘숲 너머에’, ‘숲 저쪽에’라는 뜻이고 한다.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포이아나 브라쇼브'는 브라쇼브에서 12km 떨어진, 유럽에서도 유명한 스키 타운으로, 혹시나 다음날 아침 비가 그치면 꿈의 설산이 눈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우리는 그곳에서 숙소를 구하기로 했다. 포이아나(Poiana)는 ‘숲 속의 빈터’라는 뜻으로 브라쇼브뿐만 아니라 산이든 강이든 자연환경이 좋은 곳, 고로 놀기 좋은 곳의 지명 앞에 붙는다. 브라쇼브를 떠나 산등성이를 휘감은 길을 올랐다. 인적 없는 산길을 천천히 달리는 일은 꽤 근사했다. 길 양쪽으로 빼곡히 늘어선 나무들이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나무를 타고 흘러내려온 안개는 바람에 날리다가 이내 모퉁이에 숨어 우리를 기다리고는 했다. 안개 속을 통과하면 다시 거대한 나무들이 우리를 맞았는데 그 압도적인 풍경과 함께 우리가 지금 막 가려는 산골 리조트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더해져 조금 흥분되었다. 산의 나무들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산을 거의 올랐을 무렵 GPS를 조작하느라 길가 임시 정차장에 차를 멈췄을 때에는 뿌연 창문 너머로 태어나 본 가장 아름다운 나무를 발견하기도 했다. 나무는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숲의 정령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싶은 그런 나무였다. 우리는 다음날 산을 내려올 때 다시 들르자며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 


포이아나 브라쇼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둑해 진 후였다. 비는 산 아래보다 더 거칠게 내리고 있었고 공기는 매섭도록 차가웠으며 바람은 한겨울 같았다. 희뿌연 물기를 머금은 마을은 사방 이곳저곳에 집들을 감추고 있어서 눈에 보였다 사라지는 비실비실한 간판의 불빛을 쫓아 우리는 차를 몰아야 했다. 브라쇼브를 떠나 포이아나 브라쇼브에서 호텔을 구하기까지 두어 시간이 걸렸다. 여덟 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산에서의 여덟 시는 도시에서와 사뭇 달랐다.



밤새 바람이 어찌나 드세게 불던지 산악 고립 영화에서나 듣던 효과음을 방 안에서 들을 수 있었다. 끼익끼익 홰앵홰앵. 아직은 여름이라 부르는 8월인데 아침을 먹으러 호텔 일 층 식당에 갔을 땐 욕이 튀어나올 만큼 추워서 밥이고 나발이고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 덮고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침을 먹은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케이블카를 타면 산 정산에 오를 수 있다 했기에, 지금은 운행을 멈춘 케이블카를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가 그것이었다. 바람이 이렇게 심하게 부니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해도 무서워 벌벌 떨 것이 분명했고, 가느다란 선에 위태롭게 매달려 되는대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니 그나마 포기가 되었다. 기껏 여기까지 올라와 설산을 구경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우리는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날이 서서히 개고 있었다. 우리는 전날의 기억을 더듬어 신비의 나무를 다시 찾았다. 여러 나무 사이에 있어도 그 독보적인 모습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잘 있어, 또 올게.” 라고 인사했다. 미친 거 아니에요. 나무가 정말 그랬다니까. 꼭대기에 눈을 뒤집어쓴 산을 보지 못했어도, 케이블카를 타고 그곳에 올라가지 못했어도, 이 나무 하나로 충분했다. 내려오는 길에 어제는 제대로 보지 못한 너른 초지의 구릉에서 차를 세웠다. 말 그대로 숲 속의 빈터, 포이아나였다. 산 속 구릉은 볼 때마다 새롭고 신비롭다. 제주도 오름이 그렇듯이. 누런 풀밭 위에 이제 막 파란 하늘이 드리운 참이었다. 바람은 거칠게 불어 댔지만 그러면서도 예쁜 뭉게구름을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고, 놀기 좋은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ATV 체험장도 있었지만 험한 날씨 덕분에 시끄러운 모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 루마니아에서 남편과 내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한 달의 추가 시간이었다.



산을 거진 내려오니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쉼터가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오래된 도시의 모습은 확실히 어제보다 나아 보였다. 이러니 늘 아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산을 내려오면 해가 뜨고, 걷고 싶은 길은 저 위 어딘가에 혹은 저 아래 어딘가에 있다. 달리고 있을 때의 풍경은 가만히 서 있을 때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나는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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