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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마릴린 Jan 10. 2017

There is no there there.

빛이 바라다.

브런치X론리플래닛 여행기 공모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내 나이 마흔에 이룬 가장 큰 성과이다. '그게?'라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변변찮게 살았다는 이야기일 테지만 하여간 내게는 그렇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나만큼 기뻐하며, "이제 책을 낼 일만 남았습니다."라고 내 앞에 빛나는 카펫이 깔린 듯 말했지만, 어쩌다 보니 모든 것에 지나치게 관조적인 태도를 갖게 된 나는 그 말이 괜스레 불안하기만 했다.  


잘 알려진 여행책 시리즈 중 한 권에 참여한 어느 작가의 블로그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적이 있다. 그녀의 책이 나온 것은 4년여 전의 일로, 블로그에 부지런히 올린 여행기가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을 낸 모양이었다. 처음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가 얼마나 기뻤을지,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요동쳤을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충만했던 시간은 모르긴 몰라도 4년 전에 멈춘 듯 보였는데, 4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최근 몇 달 전 그녀가 올린 마지막 글이 어느 피자 브랜드의 피자 시식기였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글씨로 쓰인 '땡땡땡 피자의 피자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정도 되는 글 위에서 그녀의 어린 아들이 공짜 피자를 두 손에 들고 함박웃음을 띤다. 현실이 대개 이런 식이라는 것을 어릴 적 진작에 터득한 나는 그녀의 마음이 되어 그녀의 아들을 보았다. 그 함박웃음을.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던 기분이 곤두박칠친 것은 론리플래닛 매거진의 봉투에 담겨 온 루프트한자의 서신을 받았을 때였다. "Congratulations! You are the lucky winner!"로 시작하는, 루프트한자 한국 지사장의 서명이 꼬리에 달린 그 문서는, 항공권 수령인인 내가 항공권의 조건을 확인하고 이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한 다음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헌데 저 인사말이 너무나 이상했다. '행운의 주인공!' 이라는 말은 백화점 경품 행사에 당첨됐을 때나 쓰는 것이지, 서로의 글을 경쟁해 일등으로 뽑힌 사람에게 할 인사로는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품 서신' 따위의 이름으로 저장된 문서를 불러와 Ctrl + v를 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어쨌거나 이상했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 것은 인사말이 아니었다. 내가 받게 될 항공권의 조건이었다. 


'2016년 12월 27일까지 유효하고, 나와 동반인이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여정으로 여행해야 하며, 예약은 여행 시작 90일 이전에 확정되어야 하며, 여행은 유효기간 이전에 마쳐야 한다. 등등...'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며 내가 영어를 잘못 이해했나 싶어 반복해서 읽고 있는데 어김없이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봐, 현실은 원래 이런 거라니까.' 내 오랜 친구가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는 유럽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유럽행 항공권'에 담긴 환상성을, 당신을 가볍게 들어 올려 햇빛 쏟아지는 유럽의 어느 작은 항구 도시로 편안하고 안전하게 데려다줄 것만 같은 그 달콤한 속삭임을, 현실에서 글로 풀어내면 위와 같이 되는 것이다. 


항공권의 만료일이 크리스마스 시즌인 점, 서신을 받은 것이 7월 초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당장 한두 달 안에 여행지를 고르고, 일상생활과 직장 스케줄을 조율하여 그 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성인 두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묻고 싶었다. 공모전에 작품을 낸 대부분의 사람들, 누군가는 직장인일 테고, 누군가는 학생일 테고, 누군가는 돌봐야 할 가족이 있을 텐데.


2009년 직장인의 9일짜리 여름휴가로 아드리아해를 따라 짧은 여행을 했다. 그 여행에서 구유고연방의 모든 나라를 여행하고 싶은 바람이 생겼고, 오랜 바람 끝에 2014년 여름 드디어 발칸을 여행하게 되었다. 그 여행을 위해 몇 달을 준비했다. 깨알 같은 글씨의 론래플래닛을 읽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지도를 그려 보고 부족한 정보를 찾아 구글을 헤맸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한 여행에서 돌아와 쓴 글이 바로 당신들이 대상으로 뽑은 바로 그 글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항공권의 T/C를 조정해 줄 수 있는지를 물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조정해 줄 수 없다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사용할 수 없다면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다른 제안이 있는지요."

조금은 으스대며 내가 번 항공권으로 남편을 태우고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은 욕심에 대안이 있는지 물었지만, 행여 대안이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상품을 받든 받지 않든 내 글이 대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런치에서 내부적인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누고 대안을 찾고 결재를 올리고 실행에 옮기는데 그 후로 두 달이 걸렸다. 진행 상황을 수시로 전달해 준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지만, 이메일을 보내고, 기다리고, 내용을 읽고, 다시 이메일을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메일 제목에 붙은 RE: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항공권 대신 '여행상품권'을 우편으로 받았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카카오의 노란 봉투에 담긴 여행상품권은 책상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두었다. 넣어둘 곳이 두 번째 서랍뿐이라 그곳에 두었는데 하필 그 서랍은 인터넷 뱅킹에 쓰는 OTP 카드 등 자주 쓰는 물건들이 든 곳이라 자주 열 수밖에 없었고, 서랍을 열 때마다 샛노란 봉투에서 눈길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빛바랜 선물은 또 다른 숙제가 되었다. 1년 유효기간의 상품권은 그 노란 얼굴로 자꾸만 나의 정수리를 두드리고 나의 등짝을 떠밀었다.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팔면 안 된다고 안 했기 때문에 상품권을 몽땅 팔았다. 이것을 파는 과정은 정말로 지리멸렬하여, 사겠다고 했다가 연락 없는 놈, 깎아 달라는 놈, 상품권 먼저 보내라는 놈, 온다더니 안 오는 놈 등등을 거치며 이것의 존재는 숙제를 넘어서 고통이 되었다. 또 다른 두 달이 흐르고 드디어 그 모든 고통 끝에 상품권을 모두 팔았을 때, 그것은 그냥 팔았다가 아니라, 팔아 치웠다 혹은 팔아 버렸다가 되었다. 그러자 한동안은 다시 구름 위에 둥둥 뜬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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