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과 카파도키아 구간을 달리는 버스의 짐칸은 항상 여행자들의 배낭으로 가득 찬다.750Km에 이르는 멀고도 먼 길은 평소엔 10시간, 길이 미끄러운 겨울에는 반나절 가까이 지나야 끝이 난다.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를 펴면 온몸으로 육중한 피로감이 전달된다. 카파도키아에 도착하면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여행하겠다던 굳은 다짐은 어느새 사라지고 후회만 가득하다.
“앙카라에 내려서 구경하고 올걸...”
앙카라가 단순한 경유 도시이기에 들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히타이트, 로마, 페르시아, 아랍, 십자군, 오스만투르크 등의 흔적 위에 쓰여진 근대 앙카라의 화려한 연대기는 여행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안타깝게도 알뜰한 시간 소비를 도울 정확한 정보가 많지 않아, 앙카라 경유는 사치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의 시간과 10만원,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신발 끈을 조이는 일 뿐이다.
택시 기본 요금은 1.3TL. 1TL=500원(2014.12.2기준)
웬만한 거리는 5~10TL이면 갈 수 있다.
한국 돈으로 2000~4500원에 준한다.
앙카라의 모든 바퀴 달린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크즐라이의 아침. 비둘기 한 마리 쉴 자리 없을 만큼 분주한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바쁜 움직임 속에서도 길가 한편에 느긋하게 자리 잡은 이들이 있다. 바쁜 직장인들이 횡단보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멈춰 서는 이곳은 바로 시밋 노점상. (Simit:밀가루 반죽을 구워 그 위에 깨를 뿌린 달지 않은 터키식 도너츠) 동네 슈퍼 아저씨 같은 투박한 인상으로, 주문을 받으면 빠른 손놀림으로 포장을 해준다.
도너츠 모양의 시밋을 가득 담은 손수레를 찾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저 길을 가다 보면 우리가 시야에서 벗어날까 걱정하는 아저씨의 또렷한 목청이 들려올 것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커피나 차이(홍차)를 곁들이고 싶다면 Tattaze나 Simit Sarayı와 같은 제과점으로 들어가 이제 막 구워진 빵 냄새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아침을 먹는 동안 정장 부대의 규칙 없는 행군은 조금씩 마무리가 되어간다. 마지막 차이(Çay) 한 모금을 비우고 한결 힘이 들어간 발걸음을 옮겨본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도착한 곳은 앙카라의 대표 상업지역 중 하나인 울루스(Ulus). 크즐라이가 현대적인 모습을 지닌 중심지라면 울루스는 조금 더 전통의 면모를 갖춘 중심지이다. 예스러운 광장을 둘러싼 낡은 건물과 정돈되진 않았지만 활기찬 상가들은 여행자의 손가락이 카메라 셔터를 기웃거리게 한다.
가게 문을 열고, 발판의 먼지를 털어내는 상인들의 부지런함에 대한 감탄이 채 가시기도 전, 앙카라 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진회색 아스팔트 끝에 대체 어떻게 성이 존재할까. 현대식 건물과의 부조화는 또 어떤 모습일까.
물음표로 가득한 호기심이 밀려올 때 쯤 신발은 이미 서서히 흙 먼지를 일으킨다. 주변은 어느새 내 키만큼 낮아진 집들로 가득하다. 미로와도 같은 동네는 과거로 걸어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시간과 함께 걸어 올라가다 고개를 드니, 낡고 투박한 벽돌 사이로 그 위대한 역사를 숨겨둔 듯한 앙카라 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은 뿌연 대기 아래로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건물과 도로. 그 위를 메운 형형색색의 차들이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정감마저 든다.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보일 듯한 앙카라 성에 올라 그 아래를 한참 내려다 본다. 머리카락을 스치며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이 왠지 나를 붙잡는 듯하다.
앙카라의 전통, 과거로의 여행은 앙카라 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교과서나 TV에서만 보던 철기 문명의 시초, 히타이트 문명의 흔적을 찾아 걸음을 재촉한다. 그 기록이 가장 많이 보관된 아나톨리안 문명 박물관. 유명한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접하러 가는 길은 오묘한 두근거림 마저 든다.
대륙, 국가 가리지 않고 여기 저기 돌아다닌, 소위 “여행 좀 해본 사람”들도 박물관에 대한 호불호는 확실하다. 지겨운 역사 수업이거나 지식 팽창의 연장이거나.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가장 효율적으로 한 민족과 도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 박물관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아나톨리안 문명 박물관의 규모는 거대하다 할 수 없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유적들의 스펙트럼에 비춰볼 때 박물관 애호가라면 반드시 들를 것을 추천한다.
초기 구석기를 시작으로 청동, 히타이트(철기), 프리기아, 리디아를 거쳐 근현대 문명의 자취를 전시하는 것도 모자라, 건물 자체도 100여 년 전 재래시장과 숙박시설로 쓰이던 공간을 재활용했다. 비록 문자로는 익숙하지 않아도 사진이나 TV로 접해봤을 만한 유물들을 제법 찾아볼 수 있다.
느긋하게 둘러본 뒤, 기대 이상의 감동을 받고 박물관을 나선다.
“Görüşürüz kankardeşim!”
(또 봅시다, 피를 나눈 형제여)
덩치 좋은 경비의 쑥스러운 외침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Ulus 광장으로 내려온다. 제 그림자를 발 밑으로 숨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마 나처럼 점심을 먹으러 왔거나, 이미 끼니를 해결하고 볕이나 쐬러 온, 잠깐의 자유를 원하는 영혼들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