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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ELYST Aug 10. 2018

캡슐 호텔

의도하지 않았던 호텔 상품의 혁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을 농업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에 인접한 일본을 병참기지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을 농업국가가 아닌 군수산업을 축으로 하는 공업국가로 성장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급격한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 일본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전례 없는 호황을 맞게 됩니다.


메타볼리즘 건축 운동


급격한 경제성장과 함께 일본 전역은 급격한 도시화를 겪게 되었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체계적인 도시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학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이 시기에 도쿄대의 단게(Kenzo Tange) 교수와 그의 연구실 또한 정부의 두둑한 지원을 받게 됩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단게 교수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기쿠타케(Kiyonori Kikutake)와 함께 1959년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에서 '유기적으로 성장해가는 건축'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들의 개념은 메타볼리즘(Metabolism) 건축으로 불리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어 모으게 됩니다. 단게 교수가 미국의 MIT에 교환교수로 떠나 자릴 비우게 되면서 메타볼리즘 프로젝트는 대학원생이었던 기쿠타케를 비롯하여 이소자키(Arata Isozaki), 쿠로가와(Kisho Kurokawa)가 이어받아 진행하게 됩니다. 이들의 활동은 1960년 도쿄 세계 디자인 회의(Tokyo World Design Conference)에서 메타볼리즘 선언문(Metabolism Manifesto)을 발표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Nakagin Capsule Tower


쿠로가와가 디자인하여 1972년 완공된 나카긴 캡슐 타워(Nakagin Capsule Tower)는 흔히 메타볼리즘 건축 운동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14 개층의 단일 건축물에는 메타볼리즘 건축 운동이 표방했던 유기적인 성장과 이를 위한 가변성이라는 개념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장의 축은 수직 동선과 설비들을 담고 있는 2개의 타워로 이루어지고 여기에 조립식의 단위 거주공간, 즉 캡슐이 가변적으로 부착되는 구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애초에 이 건물은 늦은 시각에 통근이 마땅치 않은 직장인들이 묵어갈 수 있는 호텔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각각의 단위 공간, 즉 캡슐들이 거주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들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스토브, 텔레비전, 냉장고 등이 일체화되어 벽면을 이루고 있었고 반대편 벽면에는 화장실 유닛이 설치되었습니다. 캡슐의 중앙부는 벽면과 일체화된 침대가 놓였고 각각 원형의 창문을 통해 자연채광을 유입하고 조망을 확보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조립식 캡슐은 이론적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조립이 가능했습니다. 경우에 따라 2개에서 3개의 캡슐이 하나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 조합 또한 자유로이 변경될 수 있었습니다.


캡슐 호텔


급진적인 아이디어들로 가득했던 메타볼리즘은 실제 건축물로 구현된 사례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해 일본의 호황이 정체 국면을 맞게 되면서 거창한 도시계획 이론들은 재검토되었으며 메타볼리즘 건축 운동은 점차 추진동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비록 1970년대 들어 메타볼리즘이라고 하는 선언적 개념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은 분명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전혀 다른 상업적인 필요에 대응하며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구현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쿠로가와에 의해 디자인되어 1979년 오사카에 문을 연 캡슐 호텔(Capsule Hotel)입니다.


Do-C Capsule Hotel (Shibuya, Tokyo)


캡슐 호텔은 한 사람이 겨우 누워 잠을 청할 수 있는 크기인 깊이 2미터, 너비 1.25미터, 높이 1미터 크기의 조립식 캡슐을 단위 공간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 단위 공간을 전체 공간의 용량이 허용하는 만큼 덧붙일 수 있었기 때문에 협소한 공간에 수많은 이들이 묵을 수 있는 고밀도의 호텔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캡슐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립식 구조물로 에어컨, 티브이, 인터넷 등이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한 세트의 침구류가 제공되며 화장실이나 욕실 및 식당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룻밤에 대략 2천엔 정도를 지불하면 되었기 때문에,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도심지의 일반적인 숙박시설의 10분의 1 가격으로 기본적인 숙박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적게는 50개의 캡슐로 이루어진 소규모 캡슐 호텔에서부터 700개에 이르는 캡슐로 이루어진 대형 캡슐 호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캡슐 호텔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메타볼리즘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유기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해진 공간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쨌든 이는 부동산의 가격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오른 일본의 대도시들에서 공간 효율의 극대화를 통해 유일하게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었던 숙박시설로 시장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캡슐 호텔의 후예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공간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캡슐 호텔은 일본 외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최소한의 호텔에 대한 필요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이처럼 극단적으로 협소한 공간에 친숙한 것은 일본인들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최소한의 숙박시설이라는 개념은 최근 뉴욕과 같은 고밀도의 대도시에서 파드호텔(Pod Hotel)이나 요텔(Yotel) 같은 다소 완화된 형식으로 부활했고 일본에서 또한 캡슐 호텔은 다시 활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캡슐 호텔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혁신적인 시도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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