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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워플레이스 Jun 17. 2021

아주 멀리서 온 시간

inspiration from 라미현

넓은 세상의 어느 단면을 작은 뷰파인더 속에 담으려는 생각의 과정이 사진의 시작이다.


작가들은 피사체를 선정하고 구도를 잡고 빛을 기다리며 셔터를 누르기까지 오랜 고민의 시간을 사진 속에 압축한다. 그래서 모든 사진은 작가의 의도와 계획. 때론 어떤 소명 속에서 탄생한다.


그 속에 담기는 것은 광활한 자연의 웅장함일 때도, 아름다운 모델들의 유려한 선일 때도 있고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유성의 순간일 때도 있는데. 여기 어떤 작가는 70년 전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은 참전 용사들을 기록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라미 현.


그는 지금까지 참전용사 수천 명의 사진을 찍어왔고 최근에는 수만 킬로를 넘어 다니며 6.25 전쟁 유엔 참전군인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사진 속에 담는 사람들은 한때 누구보다 강인했던 군인들이었지만 이제 모두 노년의 초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작가가 말하길, 셔터가 반짝이는 순간 그들의 눈빛은 다시 젊은 날을 마주하듯 반짝거린다고 했다.


@projectsoldierkwv
@projectsoldierkwv
@projectsoldierkwv


그들의 눈빛이 머무른 곳은 아마도 생과 사를 태연히 가로질렀던 잔인한 시간 속 어딘가가 아니었을까...


그 시간은 분명 역사가 된 기록의 하나일 테지만 이들에겐 수많은 비명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의 기적이며 필사적으로 오늘을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기억일 거였다.


70년 전 낯선 이국 땅에서 오늘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던 그들. 오늘을 지나 내일도 존재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그들은 차가운 총구 끝에서도 따듯한 고국에서의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그들처럼 언제나 현재를 살며 쉼 없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늘이란, 언제부터인가 반복되는 일상 중 하루로 또 한번 수습해야 하는 평범한 날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 참전용사들이 던져주는 오늘에 대한 메시지는 전쟁의 참상과 숭고함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마이너스가 된 통장 잔고. 꽉 막힌 출퇴근길과 지옥철을 견뎌내며 힘겹게 도착한 곳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직장이다. 잠시 눈을 감으면 월요일이 찾아오는 굴레 속에서 전쟁 같은 하루를 넘기는 것이 과제가 된 오늘.


숙취와 함께 사라진 어젯밤이 그다지 그립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게 꿈이 됐다. 그러니 누군가 참전 용사를 기억하는 것보다 누워서 쉬는 것을 선택한다 해도 이해가 된다.


@projectsoldierkwv

다만 그가 그렇게 흘려 보낸 오늘이란 70년 전 치열하게 이곳을 지켜낸 그들의 오늘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것은 한때 스튜디오 사진관을 운영하던 라미 작가가 불현듯 잊혀가는 역사의 초상을 담기 위해 세상 밖으로 뛰쳐나간 이유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가 참전 용사의 기록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건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전해진 오늘 하루. ‘아주 멀리서 온 이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울림은 아니었을까?


그저 오늘만 넘겨보자는 하루하루가 겹겹이 쌓여 미래의 날이 되는 것. 그 미래에 아쉬워할 어떤 날이 지금 쉬이 보내버린 오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앞으로 우리 역시 무엇을 과거에 남기며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작은 소명은 아닐지.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바쁘고 각박한 시절에 여유를 찾지 못했을 뿐, 그러니 오늘만 살고 말겠다는 마음은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일 거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전쟁터 위에 깃발을 꽂으며 희망을 본 그들처럼 말이다.


@projectsoldierkwv


그러고 보니 총과 사진기는 많이 닮았다.

어떤 사물을 향하고 그것을 작은 눈금 위에 올린다.

손가락 마디 끝에 신경을 곤두세운 뒤 잠깐의 시간을 의식처럼 흘려보낸다.


3, 2, 1.


손가락이 까딱이면 반짝하고 빛을 낸다.

둘 중 하나는 그것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영원히 존재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가 여전히 총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에게 오늘을 전해준 그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고 우리의 오늘도 쉽게 흘러가지 않고 존재하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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