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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상처를 말해야 한다.”

by 생각속의집


내 치유의 중심에는 언제나 책이, 문학이 있었다.
깊은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좋은 삶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매일 다시 깨어나고, 다시 내 삶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1.jpg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희망이다> 저자 박민근 문학치료사




Q. ‘나는 내 상처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는 고통을 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상처를 말할 수 있을까요?


A. 한 번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반복해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할 때마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자기 상처를 성찰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서사를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에서 어느덧 치유의 이야기로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묻어두면 그 안에서 좋은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 과정에서 좋지 않은 기억들이 증식하면서 고통의 악순환에 빠집니다. 결국 그 고통의 기억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에 지배되어 자기 삶을 제대로 못 보게 되지요. 말하자면 그 고통에 자기 삶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사회가 자기 상처를 말하지 못하도록, 입단속하게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안 되고, 결점이 있으면 안 되었죠. 사람들에게 그런 강박을 심어주니까 자기 상처를 말하면 부족한 사람, 패배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히기 쉬웠죠. 저 또한 그게 두려워서 오랫동안 제 상처를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자기 상처를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말할 수 있게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정서적 환경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자기 상처를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자기 삶을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상처의 스토리에서 희망의 스토리로 긍정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때 말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습니다. 좋은 치유자는 그 사람이 말할 때 좋은 방향으로 말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합니다. 글로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Q. 그렇다면 말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말을 할 때는 충동뇌가 작동하고, 글을 쓸 때는 이성뇌가 작동합니다. 글을 쓸 때 작동하는 이성뇌는 자기 이야기를 조정해나가면서 더 잘 쓰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이때 거짓말을 쓰면 안 됩니다. 글쓰기의 원칙하에 있는 그대로를 쓰되, 아픈 것도, 부끄러운 것도 솔직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건강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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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에서 선생님을 치유한 것은 사람, 자연 그리고 책이라고 하셨어요. 조셉 골드의 《비블리오테라피》를 보면, 좋은 문학 작품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합니다. 왜 문학작품이 치유가 되는지 말씀해주세요.

A.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처 입은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입니다. 만약 우울한 사람이 기형도의 시를 읽는다면 어쩌면 더 우울감이 깊어질지 모릅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좋은 문학이란 좀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권하는 책 중의 하나가 박완서 선생님의 《난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다행이다》입니다. 그 책에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건강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왜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태어난 것이 더 소중한지, 그리고 태어나서 우리가 살아갈 때 어떤 걸 느끼고, 어떤 일을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은 동화책이지만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그려놓고 있거든요.

마음의 상처가 있는 분들에게 좋은 문학은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가령 《빨강머리 앤》이나 《모모》라든지, 어렸을 적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책들은 그 내용 자체가 용기를 갖게 해줍니다.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옆에서 지지를 해주거든요. 그래서 문학이라는 영역이 광범위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더 절실한 문학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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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생님의 인생책으로 《빨강머리 앤》을 꼽으셨는데, 빨강머리 앤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무엇일까요?

A. 사실, 앤이 살던 시대는 여성들이 살아가기 참 힘든 시절이에요. 책을 보면 구태의연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구습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이게 맞아, 이게 옳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앤은 무시하거든요. 앤은 나만의 삶을 살아갑니다. 공부를 하고, 미래를 위해서 상상하고, 주위 사람들과 우정을 만들어내고, 사랑을 발견해내면서 말이죠. 어린 나이지만 정말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요. 앤은 끊임없이 지혜를 얻고, 성장하는 삶을 살고,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살죠. 이 힘없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끊임없이 말하고, 행동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희망의 이야기’를 발견해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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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살아낸 시간이
앞으로 살아갈 희망입니다.


* 이 글은 <살아낸 시간이 살아갈 희망이다> 저자 박민근 문학치료사와 인터뷰 내용입니다.


- 박민근, <살아갈 희망이 살아갈 희망이다> https://c11.kr/az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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