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그림책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을 읽고서...
<청춘시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어느 회 마지막에 주인공 중 한 명이 뛰다가 넘어져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저 아이는 혼자 일어날 것이라고. 아이도 울어도 소용없을 때는 울지 않는다고.
아팠냐고 물어봐 줄 사람. 괜찮은지 물어볼 사람이 있을 때, 그렇게 자기편이 있을 때만 아이는 운다고.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를 보면서 문득 이 드라마의 장면이 떠올랐다. 저자인 유범희 정신과 전문의가 했던 말과 오버랩됐다.
아이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불안해지고 운다.
그럴 때 어디선가 엄마가 마치 마술처럼 나타난다.
언제든지 신호(울음)를 보내기만 하면
엄마가 금방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은
아이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친다.
-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 중에서
이렇게 금방 반응을 보이는 엄마를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기본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 쉽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울어도 울어도 엄마나 엄마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이것이 반복될 때 아이는 분리불안을 겪는다고 했다. 분리불안은 대인관계에 어려움은 물론, 병적 불안 증상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었다.
“우리, 헤어져.”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습관성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때 연락이 닿지 않거나 옆에 있지 않으면 그녀는 늘 습관처럼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혼자인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스스로 고독한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고립과 고독은 다르다. 그녀는 고립되지 않았음에도 고독과 친해지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했다. 내 사랑이 부족해서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작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어린 날, 맞벌이로 바쁜 부모와 때론 자신을 학대했던 어머니가 자신의 손을 자주 잡아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토로했다. 말하자면 그 ‘결핍’은 그녀를 소진시켰던 것이다. 그녀가 불안을 견디지 못해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을 내게 퍼부었던 말은, 그녀 자신을 다시 학대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됐다.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는 그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녀 안에 있던 그림자 아이. 그 아이는 내내 울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그녀가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늘 자존감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던 그녀였지만, 연애할 당시에는 그런 자신을 충분히 껴안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그림자 아이를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 안의 그림자 아이를 다독이고 공감하기보다 외면했다.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에 그림자 아이가 있다는 것은
단순히 초조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내 안의 상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 중
자신의 과거 일부를 ‘흑역사’라고 무조건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흑역사도 역사고 자신의 일부다.
지금의 자신은 그 흑역사도 있었기에 가능하다. 실패와 실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삶이다. 그것을 수용할 때 자신에 대한 긍정도 가능하다.
성장은 나이 먹는다고, 경험했다고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어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 과거든 현재든 자신이 쌓아온 생을 긍정할 때, 성장은 불쑥 우리 앞에 다다른다.
그런 면에서 그림자 아이를 수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림자 아이 또한 나라는 것. 흑역사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 아이도 나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
심리학에서 그림자(무의식)는
콤플렉스, 트라우마, 상처, 억울함 등
우리 안에 숨기고 싶은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그림자가 무조건 숨기거나
없애야 할, 대상 만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소중한 일부이기도 하다.
-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 중
그녀가 당시 자신 안에 있는 그림자 아이를 수용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연애를 어떻게 했을지에 대해선 쉬이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시 그렇게 연애의 종말을 맺게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리불안이 ‘분리’를 불러온 아이러니였다고나 할까.
그녀가 자신의 그림자 아이를 수용하고 보듬을 수 있었다면, 우리 연애는 좀 더 건강해졌을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하기’라는 전제가 없었기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됐던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안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이 불안이 지배했던 나의 한 연애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등대인데,
때로는 자신의 과거에서 그것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저자에 의하면, 심리학에서 불안 발생원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분리불안’이라고 했다. 그런 분리불안을 ‘그림자 아이’로 상징화한 것은 흥미롭고 어울린다. 그림자 아이도 등대가 될 수 있다. 내 어린 날의 결핍을 찾고 인정하면서 지금의 나를 수용할 수 있으니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니까.
슬픈 기억만 골라 지워버린다고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도 그것을 보여줬다. 기억을 삭제한다고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럴 때는 마주 대해야 한다. 두 눈 부릅뜨고 만나야 한다.
그림자와 마주한다는 것은
내 안의 소중한 일부와 만난다는 것이다.
나의 어두운 모습도
피하지 않고 만날 수 있을 때,
나의 몸과 마음은 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다.
-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 중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를 읽고 나는 생각했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지금 그녀가 자신의 그림자 아이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화해했을까. 그녀가 이 책을 만났으면 좋겠다. 등대를 찾아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 있으면 좋겠다.
- 커피 스토리텔러 김이 준수,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를 읽고서
유범희, <그림자 아이가 울고 있다> https://c11.kr/8fz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