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나'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서울에서의 나는 매일 집과 회사만 오가는 삶을 살았다. 늦은 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적막이 싫어 보지도 않는 TV를 습관처럼 켜놓곤 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여행 다니는 일에 익숙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늘 가난한 상태였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했음에도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고 살았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정작 나를 돌볼 시간은 모자란 사람이었으니까. 회사에서 내 별명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였다. 그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스스로가 만든 시간의 노예였던 것이다.


제주에 살면서 드디어 나는 '시간 부자'가 되었다. 아침마다 동네 산책을 하며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지는 걸 보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읽기 시작했다. 마당 잔디밭에서 햇빛 샤워를 하며 한 시간 넘게 천천히 아침을 먹는 일도 잦아졌다. 아침을 먹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 일기는 내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루틴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집을 나서기 바빴던 그곳에선 아침밥을 챙겨 먹는 여유도, 나를 위해 온전히 비워둔 아침 시간도 당연히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집순이'였다니

제주에 와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 나는 내가 이토록 지독한 '집순이' 기질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제주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만 머무는 '집순이 모드'로 지낸다.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마당의 잡초를 뽑기도 하며 멍 때리는 시간을 즐긴다. 폭설이 와서 3일 동안 고립되어도 '냉장고 파먹기'를 하며 너무나 평온하게 잘 지낸다. 우리 집엔 TV도 없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으로도 내 세상은 충분히 풍요롭다.


제주에서는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법을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경주마처럼 무작정 달렸다면, 여기서는 달리다가 멈춰 쉬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천천히 걷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있다는 뻔한 사실도 이제서야 깨달았다.


예전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것들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 배우는 것 자체가 취미인 나는 도자기도 빚고, 요가도 하고, 바느질로 인형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연들과 한동안 잘 지내기도 했지만, 결국 '시절 인연'이라는 것을 통해 관계의 순리를 배웠다. 예전엔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며 서운해했던 일들도, 이제는 "음, 그 인연의 유효기간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가볍게 놓아줄 줄 아는 마음의 근육이 생겼다.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8cm 하이힐 대신 흙을 밟는 즐거움

제주에서 또 하나 발견한 건 내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귤밭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폭신한 흙의 감촉이 참 좋다. 돌이켜보면 서울에서는 8cm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그 딱딱한 아스팔트를 어떻게 견디며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다.


이곳에서는 아침 새소리가 나의 모닝콜이다. 수십 개의 핸드폰 알람이 끊임없이 울려대던 서울과는 딴판이다. 수국이 피어날 때쯤 장마가 오고, 수국이 질 때쯤 장마가 끝난다는 것을 지식이 아닌 계절의 변화로 알게 되었다. 여전히 텃밭 초보지만, 상추와 바질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생명력을 지켜보는 게 참 재밌다. 뻔히 알면서도 잡초를 뿌리째 뽑으면 금세 시들어버리는 광경을 보며, 생명을 지탱하는 흙의 경이로움에 신기해한다.


사실 나는 '극 I'였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발견은 따로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주 싹싹하고 외향적인 사람인 줄 안다. 사실 나조차도 내가 외향적인 사람인줄 착각하며 살았었다. 책방을 운영하며 만나는 사람이 많다 보니 다들 내가 관계의 폭이 넓고 사교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전형적인 '극 I(내향인)'였다.


사람 많은 곳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고, 시끄러운 소음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무조건 집이라는 둥지로 돌아와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 밖에서 많은 에너지를 쏟고 오면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으로 재충전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은 일어나자마자 갖는 아침 2시간과 잠들기 전 저녁 2시간이다. 이 시간만큼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한다. 그래서 나는 일기를 하루에 두 번 쓴다.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는 대신 일기장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는 일기장에 마음껏 욕도 하고 흉도 본다. 그렇게 쏟아내고 나면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서울에서는 왜 몰랐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제주에 살면서 내가 '변한'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제주는 숨겨져 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준 곳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웃어넘기는 호구 기질이 다분하다는 것,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었다는 것, 이제는 착한 사람보다 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꽤 신경 쓰는 피곤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그렇게 나는 오늘도 제주라는 나의 베이스캠프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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