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개인주의자가 제주에 잘 적응한 이유

제주 온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육지에서 전화가 왔다. "이제 그만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서울에서 함께 직장을 다니던 동료에게 온 전화였다. 하지만 난 그 전화가 무색하리만큼 이제 십년차 제주이주민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그렇게 제주에 잘 적응하며 사냐고 물곤 한다. 오늘은 그 대답을 해보려한다.


제주에 처음 왔을때가 4월 봄이었는데 어느새 8월 여름이 되었다. 집주인 삼춘이 귤밭에 일을 하러 오셨길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인사를 안 받으신다. 무안했지만 그래도 귤밭에 오실 때마다 꾸역꾸역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받던 말던,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날, 밭에서 일하시는 삼춘께 시원한 보리차와 수박을 챙겨다 드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좀 웃긴게 인사를 받지도 않는 이에게 어떻게 이런 걸 챙겨드렸나 싶다. 사실 특별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날이 너무 더우니 시원한 물 한 잔 드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삼춘이 우리 집 마루에 고양이 사료 한 포대를 툭 하니 던져놓고 가시는 게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양이 키우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가셨던 분인데 말이다. '아, 뭐지? 이 츤데레는?'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뭐 그리 야박하냐...' 싶었다. 아니, 내가 수박이랑 보리차 줬다고 그걸 고스란히 다시 돌려주냐??? 그때는 제주 사람들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주인 삼춘의 고양이 사료 선물이 야박하게 느껴졌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건 야박한 게 아니었다. 제주 사람들은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정말 싫어한다.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되돌려준다. 주고받기가 명확하고, 서로에게 빚지지 않으려는 마음.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카페 알바를 할 때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사장 언니가 잠시 외출한 사이, 젊은 커플이 들어와 음료를 주문하고 계산까지 마쳤다. 나중에 사장 언니가 돌아와서야 알았다. 그 남자가 언니의 아들이란걸. '아니, 엄마 카페에 와서 돈을 내고 커피를 사 먹는다고?' 육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보통은 엄마 가게니까 공짜라고 생각하지 않나. 하지만 제주에선 이게 당연했다. 엄마는 엄마, 아들은 아들. 공과 사가 참 명확하다.


고마운 제주사람1의 귤 따기를 도우러 갔을 때도 익숙치 않은 장면을 봤다. 오후 5시, 일이 끝나자 고마운 제주사람1이 일당을 챙겨주는데 자기 아내와 아이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일당을 주는 게 아닌가. 육지에선 '무보수 노동'을 전제로 가족끼리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데, 제주는 달랐다. 처음엔 생소했지만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거였다.


제주의 품앗이인 '수눌음'도 육지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육지가 "내가 너희 집 도와줬으니 다음엔 너도 우리 집 도와줘"라는 일손의 교환이라면, 제주는 그날그날의 노동의 계산을 정확히 마친다. 다음에 혹시라도 일이 생겨 못 갈 수도 있는데, 서로 입장 난처 할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다. 참 합리적이고 뒤끝 없는 관계다.


제주의 전통 가옥 구조인 '안거리와 밖거리'를 봐도 그렇다. 한 울타리 안에 부모와 자식이 살지만 각자 밥을 해먹는다. 각자 자신의 부엌에서. 처음엔 "한 가족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싶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같은 공간에 살되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을 존중하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자기 가족의 삶을 책임진다. 함께 살지만 의존하지 않는 삶.


나는 지독한 개인주의자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부탁하면 기꺼이 돕는 모순적인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성향이 제주 사람들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공과 사를 구분짓고, 빚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들. 내가 제주에 이토록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들의 이러한 삶의 태도가 내 성향과 결이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육지에 살 때의 나였다면 아는 사람 가게에서 커피 한 잔 얻어먹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안 그런다. 지인일수록 반드시 내 돈을 내고 사 먹는다. 옆집 삼춘이 귤을 한 컨테이너 가져다주시면, 나는 그 빈 컨테이너에 빵이나 간식을 든든히 채워 돌려드린다. 그들에게 배운거다.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키라는 어쩜 그렇게 제주 사람들과 잘 어울려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주 사람들을 보고 배우며 내 개인주의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덕분인 것 같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조심하고, 받은 도움은 잊지 않고 되갚으며, 각자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되 필요할 땐 기꺼이 손을 내미는 삶. 혼자 때론 함께. 나는 오늘도 제주 사람들에게 삶을 배우며, 점점 그들의 삶을 닮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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