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행자모드
제주로 이주하기 전, 여행객으로 들렀던 협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언니를 만났다. 자기소개 시간, 그 언니는 "저는 제주 남쪽에 사는데, 서쪽으로 1박 2일 여행 왔어요."
'엥? 제주에 사는데 제주로 여행을 왔다고?'
그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주가 얼마나 크다고 굳이 짐을 싸서 1박 2일씩이나 여행을 해? 육지사람에겐 렌터카로 하루면 섬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는 곳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제주에 산 지 어느덧 10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그때 그 언니를 충분히 이해한다. 아니, 이제는 내가 그러고 산다. 나 역시 서귀포 남쪽 집에서 서쪽으로 넘어갈 때면 큰 마음 꿀꺽 먹고 1박 2일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난다. 서울에 살때는 제주가 작게 보였는데 막상 제주에 사니 제주가 생각보다 크더라.
육지 사람들은 렌트카로 바삐 다니다 보니 당연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제주 사는 이에게는 '마음의 거리'라는 게 있다. 내가 사는 서귀포 남원에서 서귀포시까지 자동차로 30분 정도, 서울에서는 옆동네 수준인데 그것도 우리는 멀다고 느낀다. 특히 애월 사람에게 표선으로 밥 먹으러 오라는 말은, 서울 사람에게 대전쯤 내려와서 커피 한 잔 하자는 말만큼이나 무게감 있는 부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마음의 거리'가 제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거다. 멀다고 느껴지니까 제주 안에서 1박 2일 여행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거다.
그런 제주에 살다 보니 나는 '일상생활자'이면서 동시에 '여행자'로 살아간다. 바쁘게 일하고 좀 쉼이 필요할 때, 나는 여행자 모드로 변신!
관광객들이 흔히 가는 송악산 둘레길이나 섭지코지 같은 곳을 가기도 하고, 때론 본태박물관 같은 곳도 가고, 오름도 간다. 사실 제주에 산다고 모든 오름을 다 가본 게 아니니까. 집 근처에 물영아리 오름이 있는데 제주 살면서 최근에야 처음 가봤다. 오름 아래 김밥집에서 김밥도 먹고 출발했다. 사실 기대 전혀 안 하고 갔는데 목장 옆을 걷는 길이 마치 소풍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아무래도 이 곳에 살다보니 여유로운 마음으로 움직인다. 관광객들처럼 도장 찍듯 다니지 않는다. 그 계절에 가장 어울리는 곳을 찾아간다. 관광객처럼 조급할 필요도 없고, 관광객이 덜 붐비는 시간에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애월이나 함덕 해수욕장 같은 유명한 곳을 찾아가지만 나 같은 이주민은 제주 사람들만 아는 숨은 스팟을 가기도 한다. 지금은 모 드라마 촬영지로 너무 유명해졌지만 그전에는 현지 사람들만 알고 있는 용천수가 나오는 곳에서 물놀이를 하곤 했다.
이게 제주에 사는 여행자의 특권이랄까?
관광객들 눈에 제주는 '관광지'로만 보이고, 제주 현지인들 눈에 제주는 '삶의 터전'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이주민에게 제주는 조금 독특하고 다양한 면을 살게 해준다.
삶의 터전이 곧 여행지가 되고, 일상이 곧 여행이 되는 곳.
물론 이 둘 사이에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어떤 날은 생활자로, 어떤 날은 여행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