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런던에 살 때, 나는 소호 근처 칩스 가게를 자주 찾았다. 영국은 정말 음식이 맛없기로 유명하지만, 나에게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칩스(chips), 감자튀김이다. 한국에도 흔한 그 감자튀김 맞다.
처음엔 그냥 칩스만 주문했다. 그런데 줄을 설 때마다 가게 주인이 칩스를 건네주며 "with salt and vinegar?" 하고 묻는 게 아닌가. 엥? 감자튀김에 식초를 뿌린다고?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도 모르게 "Yes!"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내 손엔 소금과 식초를 톡톡 뿌린 칩스가 쥐어졌다. 그런데, 어! 이게 뭐야? 생각과 달리 너무 맛있는 거다.
그다음부터 나도 영국 사람들처럼 소금과 식초를 듬뿍 뿌린 칩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칩스 가게 앞을 지나갈 때 풍기는 그 시큼하고 고소한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감자튀김에 소금과 식초를 뿌려 먹으면 왜 런던에서 먹었던 그 맛이 나지 않는 걸까?
영국의 칩스만 그런 게 아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유명한 젤라또 가게 '파씨'. 로마에 가면 무조건 먹어야 하는 디저트라고 해서 나도 먹어봤다. 쌀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리조(쌀) 젤라또 위에 생크림까지 듬뿍 얹으면 그 맛은 배가 된다. 요즘은 세계 어디를 가나, 심지어 한국에서도 젤라또를 쉽게 먹을수 있다. 그런데 내가 로마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왜 그럴까?
태국의 팟타이도, 발리의 나시고랭도 마찬가지다. 태국에서 유명한 연유토스트. 뭐? 토스트에 연유를 뿌려먹는다고? 너무 달지 않겠어? 하지만 그런 의심이 무색할 만큼 태국에서 먹는 연유토스트는 정말 꿀맛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 그건 그 주변국가 베트남도 싱가포르도 아닌 태국에서만 먹어야 맛있으니까.
대체 장소와 음식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재료의 차이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곳의 공기, 물, 그리고 환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레시피가 아무리 똑같아도 물이 달라지면 음식 맛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을 몇 년 전 발리에서 배웠다. 날씨도 마찬가지다. 더운 나라에서 먹어야 제맛인 음식과 추운 나라에서 먹어야 하는 음식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제주에 살다 보니 나도 어느새 제주 사람들의 입맛에 길들여지고 있다. 주로 제주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로 만든 담백한 음식을 먹는다. 제주 음식은 대부분 싱겁고 담백하다. 육지처럼 고춧가루를 많이 쓰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은, 소위 말하는 '건강한 맛'이다.
제주에서는 흔하지 않은, 내가 육지음식이라고 부르는 부대찌개, 쫄면 같은 것들은 육지에 가면 먹곤 한다. 물론 제주에서도 먹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육지 음식이다 보니 육지에서 먹는 게 더 맛있다.
그러고 보니 음식은 장소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 같다. 장소는 음식의 맛을 완성하는 또다른 하나의 양념이 아닐까? 런던의 비 오는 오후, 로마의 따뜻한 햇살, 태국의 뜨거운 햇볕. 그 모든 것이 음식의 일부였던 거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곳의 음식을 떠올리며 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음식의 맛을 완성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