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도 온도가 필요하다
얼마 전 일을 하다가 우연히 근처 밥집에 들어갔다. 집밥 같은 정갈한 음식들과 함께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평소 늘 마시던 분홍색 라벨의 제주 막걸리였기에 사실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한 모금 들이켜자마자 나도 모르게 "어? 이거 뭐야?" 혀끝을 촘촘하게 파고드는 탄산의 청량감, 뒤이어 오는 깔끔한 단맛. 분명 내가 매일 마시던 그 막걸리인데, 완전히 다른 술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도 그 밥집을 찾았다. 근처에 갈 만한 곳이 없기도 했지만, 사실 그 막걸리 맛이 자꾸 생각나서였다. 다시 주문한 막걸리는 역시나 맛있었다. 어제와 똑같이, 소름 끼치도록 맛있는 상태였다.
대체 이 막걸리의 비밀이 뭘까. 궁금해하며 주위를 살피다 발견했다. 사장님이 주방 구석 김치냉장고에서 조심스레 막걸리를 꺼내 오시는 것이 아닌가.
'아하, 저기에 있었구나.'
찾아보니 섭씨 5도는 막걸리의 탄산과 유산균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온도라고 한다. 김치냉장고의 '정온' 기능이 효모의 시간을 붙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막걸리야말로 병 안에서 효모가 역동적으로 숨을 쉬는, 온도에 가장 예민한 '생명체' 같은 술이다. 5도라는 온도는 탄산이 액체 속에 가장 꽉 붙들어 매어지는 지점이자, 단맛과 신맛이 황금 밸런스를 이루는 최적의 지점이었다.
그때 '아차' 싶었다. 서울에 살 때 우리 집에는 와인 셀러가 있었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 10여 병을 각각의 적정 온도에 맞춰 애지중지 보관하곤 했다. 와인 온도에는 그렇게 유난을 떨던 내가, 막걸리에게도 가장 맛있는 온도가 있다는 사실은 왜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을까.
10년 전 제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 이곳에선 맛있는 와인을 구하기가 참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기분이라도 내보려 와인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던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막걸리와의 인연이 어느덧 내 식탁에 빠지지 않는 단짝이 되었고, 이제는 막걸리 없는 제주 살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좋아하는 막걸리가 좋아하는 온도를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아니,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막걸리를 마실 때면 그 백반집이 생각난다. 아, 그 집 막걸리 진짜 맛있는데.....
사실 밥집 사장님이 내어준 것은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라, 막걸리가 지닌 최상의 맛을 손님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다는 다정한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손님의 목을 축일 첫 모금이 가장 완벽한 온도로 닿기를 바라는, 작지만 단단한 '전략적 배려'였다.
결국 그날 내가 감동했던 막걸리의 온도는, 가장 맛있는 순간을 대접하고 싶어하는 사장님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