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유없이 귤밭에 가곤 한다. 오늘도 도서관 가는 길에 잠깐 귤밭에 들렀다. 여름의 끝자락이라 유독 더 뜨거운 여름날, 귤밭에서 옆구리 터진 청귤을 만났다.
마치 누군가 칼로 그어놓은 듯 터져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귤이 터진 현상을 '열과'라고 한다. 더운 여름날 청귤 속 과육이 너무 빨리 팽창하면서 껍질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터져버린 거다.
나는 이 터진 청귤을 보며 지난번 발리에 사는 카덱이 나에게 질문했던 게 떠올랐다. "키라, 왜 한국은 자살률이 그렇게 높아?" BTS팬인 카덱은 이제 한국의 사회현상에도 관심이 생겼나보다.
그때 나는 카덱에게 '너도 한국에 3개월만 살아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오늘 터진 청귤을 보니 그때 카덱이 내게 했던 이 질문이 떠올랐다.
맞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건 터진 청귤 같은 거였다.
올해가 광복 80주년이라고 한다. 독립한지 100년도 안된 이 나라가 아주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루고,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의 내면에는 터진 청귤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강한 햇빛과 갑작스러운 수분 공급으로 청귤 안 과육이 빠르게 자라지만, 청귤의 껍질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갈라지는 것처럼, 한국 사회도 외적 성취만을 쫓아가다 내면의 성장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외적인 팽창을 한다. 하지만 자기 이해, 감정 조절, 의미 있는 관계, 내면의 성숙과 같은 '과육'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겉으로는 성장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마음 어딘가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번아웃, 우울감, 관계에 대한 피로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청귤의 열과를 방지하려면 갑작스러운 물 공급이나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자체 조절 능력이 중요하듯, 우리에게도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나 변화들을 자신만의 속도로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 성취와 휴식, 도전과 안정, 혼자만의 시간과 사람과의 연결이 조화롭게 섞여야 온전한 성숙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나는 터진 청귤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들을 내면이 잘 소화하고 있는가?'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함께 기르는 게 진정한 성숙이라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어떤 변화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중심을 만들어가는 것, 그게 바로 터지지 않는 삶을 위한 균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