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요즘 나의 제주 맛선생 H와 밥을 먹다가 깜짝 놀랐다. 고추가 너무 매운 거다. "요즘 어딜 가나 왜 이렇게 고추가 매워?"라고 투덜거리자, H가 무심하게 답했다.
"옛날 제주 어른들이 그러는데, 여름이 유독 더우면 고추가 맵대." 진짜? 처음 들어본 이야기였다. 더운 날씨와 고추의 매운맛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제주 어른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 고추가 매운 맛을 내는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전략이었다. 고추는 해충이나 동물이 자신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려고 캡사이신이라는 무기를 만든다.
특히 여름철, 강한 햇빛과 높은 온도는 고추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다. 식물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자손을 안전하게 남기기 위해 열매를 더욱 강하게 보호하려 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고추일수록 평소보다 더 많은 캡사이신을 만들어 매운맛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한여름의 고추가 평소보다 더 매운 건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고추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관찰은 정말 놀랍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삶이 버거워질 때, 우리 역시 저마다의 '매운맛'을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눈물 대신 웃음을 꺼내고, 누군가는 상처를 감추기 위해 더 다정해진다. 또 누군가는 고통을 글이나 노래로 바꿔내며 스스로를 지켜낸다.
그래서일까. 힘든 시기를 견뎌낸 사람들이 특별한 깊이를 갖게 되는 것도, 어쩌면 고추와 같은 이치일지 모르겠다. 뜨거운 여름을 버텨낸 고추가 더 강한 매운맛을 갖게 되듯, 삶의 뜨거운 더위를 견뎌낸 우리도 더 단단하고 풍요로운 내면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매운맛은 꼭 나쁘게만 다가온 게 아니다. 고추가 음식에 들어가야 맛이 더 풍요로워지듯, 우리가 겪은 어려움과 그로 인해 생긴 '매운맛'도 결국은 삶의 한 조각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제주 어른들이 관찰한 자연을 통해, 우리는 또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때로는 매워도 괜찮다고, 그것마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매운맛은 결국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삶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