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우스노마드의 시작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 저는 버킷리스트 3개를 완성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느낀 건 성취감이 아니라 묘한 공허함이었습니다. 가고 싶던 곳을 모두 갔는데, 이게 뭐지? 뿌듯함도 없고, 더 이상 가보고 싶은 곳도 없어졌습니다. 대신 저는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를 현실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늙어서도 좋아하는 여행을 다니고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제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좋은 조건에 연락이 다시 온 시점이었습니다. 또, 해보지 않았던 컨텐츠 개발을 하는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같은 분야였지만 컨텐츠 개발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죠. 그래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급여는 사회 초년생 초봉 수준이었고, 직원 5명인 아주 작은 회사였답니다. 급여도, 회사 규모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상하게 이 컨텐츠 개발 회사에 자꾸 마음이 끌렸습니다. 결국 좋은 조건의 회사를 포기하고 이 작은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 했던 게 제가 파트장일 때 우리 회사 말단 직원이었던 사람이 이 작은 회사에서는 저보다 상급자였다는.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았던 길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더불어 제 겉모습도 하나둘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명품 가방 대신 백팩을 메고, 자동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출근했습니다. 집도 회사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작은 10평도 안 되는 오피스텔을 구했지요. 그전에 30평 넓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지만 버킷리스트 여행이 제게 물질적인 것은 그다지 삶에 커다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 터라 이제 제 삶에 넓은 아파트와 좋은 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은 제게 왜 버스 타고 다니느냐, 차를 구입하지 않을 거냐고 자꾸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겉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였는지 저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처럼 안타깝게 바라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답니다. 그저 새로운 일을 익히느라 바빴으니까요.
6개월쯤 지났을까요? 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정직'입니다. 전 직장에서는 당연했던 투명한 행정처리가 이곳에선 교묘하게 법을 비껴가고 있었습니다. 법꾸라지 같은 일들이 하나둘 제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출근길이 무거워졌습니다. 배울 건 다 배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신념과 맞지 않는 회사에 계속 출근하다가는 병이 날 지경이었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뜬금없이 제주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그 통화의 시작이 전혀 다른 삶을 안내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굴인지도 모른 채...
다음 이야기는 <하우스노마드 프로젝트> 두번째 시리즈 "마이 베이스캠프, 제주"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