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밭에서 함께 귤을 따던 삼춘들은 대부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60대, 70대, 80대까지 다양했다. 처음엔 그저 제주의 사계절이 궁금해서 귤을 땄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그분들에게서 제주어, 제주음식, 제주 문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나의 숙제 같았던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고민에 대한 답을 몸소 보여주고 계셨다.
이 질문은 제주에 오기 전부터 나를 따라다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사십 대 중반이 되었다.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 내 나이 40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60세의 나를 상상해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50대 한국인 언니가 내게 "너, 재수 없으면 백 살까지 살지도 모른다"라고 했을 때, 나는 30대 중반이었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저 주어진 하루를 잘 살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백 살까지 살지도 모른다는 그 말은 사실 끔찍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때 내 여행은 마치 '노후', 즉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라고 떠난 여행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나와 가족처럼 지냈던 이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그들을 통해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나도 나이 들어서 여행 다니려면 몸이 건강해야겠는걸. 돈도 있어야겠네. 소울메이트 같은 사람도 있으면 좋겠다. 라고 말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숙제를 안고 한국에 돌아와 우연히 제주에 오게 됐다. 그리고 귤밭에서 삼춘들을 만났다. 육지에 살 때는 대부분 내 또래랑만 어울렸는데, 삶의 터전이 바뀌니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도 모두 바뀌었다.
참 신기한 것은 나보다 나이 많으신 이분들과 나는 친구라는 것이다. 심지어 말이 아주 잘 통하기까지 한다. 내가 붙임성이 좋아 어른들하고 잘 지내는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저 주변에 어르신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과 어울리고, 지금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고, 그 나이에 불편한 것들이 무엇인지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혼자서 두 발로 서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진다거나, 치아가 불편해서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 일. 젊은 시절에는 절대 알수 없는 것들이다. 아, 조금이라도 젊을 때 치아 관리를 잘해야겠어. 나이 들어서도 혼자 스스로 걸을 수 있어야 하니, 내 몸 하나는 내가 직접 챙겨야겠어. 나이 들어 혼자 살아도 주변에 마음 맞는 이들이 가까운 곳에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주변에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많은데 다들 집에서 혼자 밥 먹는 모습이 나는 그렇게 싫어 보이더라. 그래서 우리 집주인 삼춘이 밭에 일하러 오시면 꼭 점심을 함께 먹곤 했다. 혼자 귤 창고에 앉아서 쪼그리고 밥 먹는 모습에 내 마음이 불편했으니까.
내가 제주에 살면서 우리 엄마보다도 더 많이 얘기하고 함께 밥 먹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집주인 삼춘이다. 처음 삼춘을 만났을 때 60대 중반이었는데 이제 70대가 되어버린 제주 할망. 나는 이분을 이모라고 부른다. 가끔 춘자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젊은 것 같고, 젊다고 하기에는 할머니 같은 그 어중간한 지점이라서 말이다.
주인 삼춘은 어릴 적 가난했던 시절의 물질하러 갔던 이야기뿐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지혜 같은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시곤 한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옛날옛적에 호랑이가 살았는데 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그 이야기들이 그리도 재밌다.
"키라야, 왜 제주 제사상에는 고사리 올리는 줄 알아? 고사리는 끊으면 또 자라고 또 자라잖아. 그건 자손이 번성하라고 제사상에 고사리 올리는 거야."
"왜 보리콩이라고 하는지 아나? 보리 심을 때 심고, 보리 거둘 때 먹는다고 해서 보리콩이라고 해."
언젠가 주인 삼춘한테 어떻게 늙고 싶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삼춘의 어머니가 꽤 오래 육지 요양원에 계셨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병원 침대에서 호스를 꽂아 죽을 섭취하며 지내셨다.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니야.' 자신은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스스로 두 발로 서서 걷겠다고 말이다.
나이 들어서도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내 두 발로 내가 원하는 곳에 걸어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나이 들어가면서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제주 할망을 통해 또 배운다. 나이가 들어도 내 손으로 내 밥 한 끼 정도는 차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 어디에서도 배울수 없었던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를 제주 71세 친구에게서 오늘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