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면서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계절을 먹는 일이다. 제주 삼춘들은 자신만의 우영팟(텃밭을 이르는 제주어)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부지런한 삼춘들의 우영팟은 1년 내내 그들의 밥상을 채운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나는 오일장에서 모종을 사와 집 옆 텃밭에 심었다. 그저 흙에 모종을 심기만 하면 알아서 열매가 달리는 줄 알았다. 나중에 내 텃밭을 본 주인삼춘이 "이게 뭐냐, 누가 이렇게 심었냐, 텃밭 한가운데 오이를 심으면 어떻게 하냐"고 야단이었다. 모종도 종류마다 심는 위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주인삼춘 텃밭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텃밭농사의 노하우를 배워갔다. 보리콩(완두콩)을 따 먹고 나면 두불콩(강낭콩)을 따 먹고, 그다음엔 검정콩...... 콩을 수확하는 순서도 알게 되었다.
제주의 계절을 먹으며 살다 보니 자연스레 제철 식재료에 관심이 생겼다. 처음엔 나도 제주 어느 곳이나 귤이 나고, 당근이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제주 안에서도 지역별로 자라는 작물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서귀포 남원은 귤농사가 대부분이다. 6월에 맛볼 수 있는 초당옥수수는 애월읍에서 자란다. 애월 반대편에 있는 남원에서는 초당옥수수가 육지처럼 귀할 수밖에 없다.
애플수박 역시 애월에서 자라는 작물이라 서귀포에서는 귀하다. 그렇다면 그걸 모티브로 책방 행사를 준비해보면 어떨까. 제주에서 자라지만 서귀포에서는 귀한 제철 식재료를 맛보는,
이름하여 제주의 계절을 담아<키라네 북캉스>
아기귤이 달리기 시작한 초여름 6월, 초당옥수수로 행사를 기획했다. 초당옥수수를 먹으면서 각자가 가져온 책을 책방의 원하는 공간에서 읽는 시간을 가진 후, 자신이 읽은 책 소개와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의 한 구절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단순하게 꾸며본 아주 간단한 행사였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플랜B였다. 초당옥수수를 가지고 초당옥수수 솥밥 같은 쿠킹클래스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혹시 몰라 차선책으로 생각해둔 프로그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쿠킹클래스 준비에 문제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이 프로그램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사실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한 프로그램이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 행사는 손님들 만족도가 아주 좋았다. 초당옥수수는 당연히 맛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왜 그 책을 고르게 됐는지, 함께 나눈 구절을 서로 귀담아 들어주었다. 예상과 달리 손님들이 너무 좋아해주셔서 이 프로그램을 여름 시리즈로 이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7월에는 제주수박으로 이 행사를 똑같이 진행했다. 애플수박 시즌이 끝나버려서 하는 수 없이 커다란 제주수박으로 진행했는데, 이때 또 하나 배웠다. 하우스수박과 노지수박은 맛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애월 노지수박으로 행사 준비를 했는데, 맛은 하우스수박이 더 달달하고 좋았다.
수박은 햇볕 쨍쨍한 날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인데 하필 행사 당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뭔가 부조화스러운 듯한 상황에 빗소리 들으며 책을 읽고, 수박을 먹는 게 손님들은 너무 즐거운거다. 수박을 먹으며 각자의 책을 읽고,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 행사도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책방사장이 제철 식재료에 욕심을 부리다 보니, 8월까지 이 시리즈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제주 여름에 절대 빠지지 않는 '우미'를 준비했다. 우뭇가사리를 끓여 만든 묵을 제주에서는 '우미'라고 부른다.
나는 제주에 살면서 우미를 처음 먹어봤다. 제주사람들이 먹는 스타일로 간장과 깨를 넣고 새콤달콤하게 만들면 여름 최고의 별미가 된다. 우미를 콩물에 넣어 먹기도 해서 나는 두 가지 버전을 모두 준비했다.
이때 동네 삼춘 찬스를 이용했다. 행사 전날, 삼춘이 미끌미끌 우미를 기가 막히게 채썰어 주셨고, 우미 양념도 직접 해주셨다. 콩물은 표선 오일장의 두부아저씨 찬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예쁜 그릇에 담아서 책방손님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이때 참석한 손님 중 제주에서 나고 자란 분이 계셨는데 "어릴 때 먹었을 땐 늘 먹는 거라 그렇게 맛있는 줄 몰랐는데, 이렇게 예쁜 그릇에 담아서 먹으니 정말 별미네요!" 하셨다.
예전의 나처럼 우미를 처음 먹어본 육지 사람들은 제주음식에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다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각자 가져온 책을 읽고, 한여름에 어울리는 구절을 나누며 우미를 먹던 그 시간이 참 시원했다.
그렇게 세 번의 시즌을 거친 제주의 계절을 담아 <키라네 북캉스>는 제주사람들에게는 추억을, 육지사람들에게는 새로움을 선물했다. 제주의 계절을 함께 나누며, 책방은 그렇게 계절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간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