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아흔 살이 넘은 건물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연말을 맞아 건물 전면을 비디오 아트로 꾸몄는데 그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백화점’은 시대를 불문하고 당대의 최첨단 문화와 기호로 가득 찬 곳이다. 올해(2021년) 코로나 시국에 오픈한 ‘현대백화점 더 현대 서울’이 오픈 첫 주말만에 11만 명이 다녀가고, 한 달 동안 1천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는 걸 보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몇 년 전, 명품에 대해 궁금해졌던 계기가 있다. 순수 미술을전공할 때였는데, 내가 전공하던 분야는 상업적 가치가 없기로 유명했다. 괜찮은 작품도 길에 버려져있고, 가끔 중고나라에서 대가의 작품이 10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팔렸다. 그런 이유로 '왜 이 분야는 대중적이지 못할까. 돈이 되지 못할까?' 궁금하던 차, 명품 브랜드 상품들은 비싸도 없어서 못 판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곤 무작정 그쪽 업계의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본점'에서.
그렇게 치기 어린 호기심에 명품관 매장 알바를 시작했다. VIP들을 만나 접객하는 일과, 명품을 취급하는 일은 하루하루 신기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다만, 혹독한 시간들도 있었다. 출근한 첫날부터 손님이 잃어버린 알렉산더 왕 카디건을 네가 가져갔냐며 도둑으로 몰려 창고로 불려 가 혼났던 기억, 지방 출신인 내 말투가 이상했는지 조선족이냐고 물었던 손님, 직원들은 공손히 서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매장에 의자조차 없었던 그런 시간들.
당시 시급이 5천 원이었는데, 또래로 보이는 손님이 500만 원짜리 코트를 덥석 구매하며 "500만 원? 엄마 이거 완전 거저네."라고 했던 말이 생생히 기억난다. 부의 양극화를 몸소 느낀 시간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 이후로 어른들의 잔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대생이니 더더욱 '사무직'이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공감할 수 있었다.
ⓒ 직접 촬영한 명동 신세계 본점 미디어 아트, 2021년 12월
한편, 당시 가장 기억 남는 건 신세계 백화점 건물이다. 명동은 모던뽀이와 걸들이 즐비하던 압구정 로데오 같은 동네였다. 그 중심에 있는 신세계 본점은 원래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이었고 그전엔 경성부청 자리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시청이 되겠다.
1930년에 백화점으로 세워진 이곳은 1950년 6.25 전쟁을 겪고, 한동안 미군 PX로 활용됐다. 그 후 현재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되었다.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당대 굉장히 핫했던 곳으로 고전 작품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다. 백화점이 오픈한 6년 뒤 천재 작가 이상의 <날개>에도 이곳이 등장하는데,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는 문장이 있다.
나아가 1936년 영화 <미몽>에서도 잠깐 등장한다.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한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서 화가 옥희도가 생계를 위해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곳이다. 아마 PX로 활용되던 때가 배경인듯하다. 최근 개봉작인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안경 맞추는 그곳이다.
가장 오래된 거리들. 가장 오래된 건 그만큼 가장 깊게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좋다. 내게 '서울'하면 가장 생각나는 곳은 이 명동 일대부터 광화문, 을지로를 지나 혜화까지다.
크리스마스 조명 아래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퇴근하면 이렇게 혼자 명동 골목 구석구석을 구경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