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힐튼 서울을 추억하며
몇 가지 요상한 취미에 대해 밝히자면, 도시의 빌딩들을 좋아한다. 광화문에도 첫눈에 반했던 최애 빌딩이 있다. 이따금 멀디 먼 그곳에 들러 커피를 마신다. 물려받을 유산도, 예정된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그 간결하고 고즈넉한 빌딩의 분위기가 좋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1층에 입점한 스타벅스에서 놀다 간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그냥 그곳이 자꾸 생각났다.
그런데 작년 즈음 회현역과 서울역 사이 '밀레니얼 힐튼 서울'이 없어진다며 그 전에 꼭 한번 들러보라는 지인의 말을 들었다. 그 전까지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인데 내 취향을 잘 아는 분이라서 가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세종시에 출장 갔다가 서울역에 오는 길에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서울역에서 걸어갔는데 호텔에 있는 '세븐럭'이라고 써진 외국인 전용 카지노 간판이 휘황찬란했다. 호텔 정문 입구로 들어갔다. 와, 여기 신기하다. 내 최애 빌딩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할머니가 수십 년간 애지중지 사용한 명품 카디건' 같은 느낌. 올드했지만 기품 있었다. 내가 구경 갔던 날은 평일이라 그런지 몰라도 이용객의 연령대가 높았다. 1층 로비에서 카지노 가는 길에 여자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칸마다 위아래로 문이 트여 있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80년대 빈티지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호텔 로비에서 홀리한 성탄절 트리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아래층에는 크리스마스 자선열차가 운행 중인데,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1977년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돌파했다. 대한민국은 그 자신감을 추진력 삼아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유치했다. 겹경사였다. 그때 대우그룹은 현재 서울스퀘어(전 대우센터) 빌딩 뒤, 지금의 밀레니엄 힐튼 서울이라는 특급호텔을 오픈한다. 당시 해방 이후 40여 년간 이 일대는 손꼽히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멋들어진 특급호텔이 들어서게 된다. 건축 설계는 서울 역사박물관, SK 서울 서린동 사옥, 우양 미술관,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삼성동 한전 부지의 현대자동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설계를 맡은 원로 건축가 김종성의 작품이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작년 말까지 39년간의 영업을 마쳤다. 철거 후 주변 지역과 같이 재건축 될 예정이다. 어느 건축학과 교수는 이를 두고 “신라 범종을 녹여 가마솥을 만드는 꼴”이라 지적했다. 보존 가치가 충분한 유산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일 것이다. 앞으로 이 빌딩은 운명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