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하는 부산에서
전남 출신인 나는 대한민국에 두 도시를 동경하곤 했는데 서울과 부산이다. 서울엔 거주하고 있으니 'ㅇㅇ에 한 달 살기' 같은 기회가 온다면 부산에 살아보고 싶은 로망이 있다.
몇 년 전부터 부산에 가려고 할 때마다 매번 코로나로 불가피하게 취소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작년 말, 갑자기 쉬는 날들이 생겨서 마음먹고 다녀왔다.
그 시작은 남포동 가솔린엔로지스.
유명세만큼 웨이팅이 길고 재료 소진이 빠른 곳이라 오픈 한 시간 전부터 기다렸다. 결론적으로, 라멘을 환장하게 좋아하지만 여긴 다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수면바지 같은 반바지에 수더분한 종업원들의 접객. 초등학교 책상 같은 테이블 6개. 환풍기부터.. 그 많은 먼지들을 직관하며 비릿한 육수 향까지 더해지니... 라멘이 아무리 맛있어도 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겠더라. 그래도 괴짜 같은 라멘을 경험하고 싶은 분께는 추천한다.
전포동 장르는 건어물
라멘 먹고 나오는 길에 본 가게. 소포장, 무게대로 건어물과 견과류(안주)를 살 수 있는 가게다. 영도에서 비슷한 콘셉트의 무인점포도 봤는데 괜히 또 "이런 거 창업하면 괜찮겠는데"라고 헛생각을 하면서 오징어 한 봉지를 샀다. 무엇보다 여긴 가게 이름과 로고가 너무 귀엽다.
동래 온천장 '허심청'
부싼 하면 사우나 아닌가. 신라시대 때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동래 온천동에 가면, 농심에서 운영 중인 허심청이 있다. 근방에서 제일 유명하고, 그만큼 규모도 크고 수질도 좋다. '호텔 농심' 도 함께 운영하는 것 같은데 이 호텔은 각 방마다 온천수가 나온다고 들었다.
사실 수질은 인근에 더 좋은 곳들도 많지만, 허심청이 리모델링했다는 말에 와보고 싶기도 했고, 코로나 때문에 아무래도 큰 곳이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널찍한 온탕에서 피로를 풀었다. 목욕탕만의 메아리와 백색소음, 냄새가 그리운 순간들이 있다. 그 가운데 있노라면 마치 코로나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언제쯤 우리는 목욕탕에 마음 놓고 갈 수 있을까. 돌아가는 길에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사고 온 허심청브로이 맥주가 눈에 아른거린다.
해운대, 펠릭스바이stx호텔
대한민국 제1 항구도시에 놀러 왔다는 관광객의 의무감은 자연스레 오션뷰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마음만 버리면 부산에서도 충분히 합리적인 숙소들을 구할 수 있다. 비록 이곳도 아파트 뷰였지만 베란다까지 있고 청결하고, 조용하면서 접근성이 좋았다. 호텔 신규 회원 대상 웰컴 드링크도 폴 바셋 커피를 주던데 체크인을 늦게 해서 먹어볼 수는 없었다.
해운대 시노베 와플
해운대에서 먹어볼 만한 주전부리다. 브라운 치즈에 바삭한 와플 조합은 맛이 없을 수 없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시노베 매장은 부산에만 있다. 먹고 가기에는 자리가 협소한 편인데 해운대에서 숙소가 가깝다면 한 번쯤 포장해가는 것도 추천한다.
해운대 아저씨 대구탕
해운대보단 미포항이려나. 해운대에서도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대구탕 집. 평소에도 대구탕을 좋아하는지라 부산의 유명한 대구탕 집들 중에 고르고 골라 선택한 집이다. 대구탕은 말이 필요 없게 담백하고 든든한 스타일이고, 반찬으로 주시는 멍게 젓갈이 매력적인 곳이다.
대구탕 먹고 해운대 한 바퀴.
더베이에서 본 부산 마천루.
그저 짧은 하루가 아쉬웠던 밤.
영도 대우회센타
다음 날 일찍부터 영도로 향했다. 부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인 영도. 2018년에 혼자 영도를 걷다가 할머니가 혼자 하시는 물회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평소에 먹던 살얼음 가득하고 육수가 넘치는 스타일이 아니라 회비빔이라고나 할까. 그런 아까무스 물회에 생선국을 내어주셨는데 정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정말 로컬 사람들은 그렇게 물회를 먹는다고. 그 물회 집에 가고 싶었는데 할머니 사장님이 건강이 좋지 않아 문을 닫으신 듯했다.
그래서 같은 로컬 스타일이지만, 가자미로 물회를 내어주는 대우회센타에 찾아갔다. 거의 오픈 시간에 맞춰가서 "식사될까요. 사장님?"을 외치고 착석.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 혼자. 가자미 물회는 아까무스와는 또 다른 꼬들꼬들함이 인상적이고 푸짐했다. 같이 주시는 매운탕도 양이 많은 편.
영도 복합 문화공간 '피아크'
영도가 최근 들어 더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피아크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피아크는 영도에 위치한 대지 면적만 3천 평 규모의 초대형 카페다.
도대체 어떤 자본력이면 이런 건물을 지어서 카페를 할 수 있는 걸까. 무려 층마다 콘셉트가 다 다르고 실내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주차장만 해도 그 스케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규모다. 뚜벅이라 버스를 타고 가긴 했는데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웬만하면 버스나 택시로 가야 수월할 것 같다.
피아크를 론칭한 이 회사는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선박수리회사 제일SR로, 사옥의 일부 공간에 복합 문화공간을 만든 것이다.
그 옆에 '스크랩'도 같은 회사에서 만든 아트갤러리 카페다. 피아크가 스케일로 압도한다면, 스크랩은 조금 더 도전 정신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내가 방문했던 시기에는 바캉스를 주제로 한 기획전에 걸맞은 시티팝이 흘러나왔다. 창문 밖으로 담긴 풍경은 탁 트인 바다는 아니지만 선박 뷰도 근사했다.
한참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스크랩은 본진(?) 피아크에 비해 방문객도 훨씬 적고 더 감각적이라 취향이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타겟층이 뾰족하니 나처럼 취향에 딱 맞는 사람들은 더 푹 빠져들곤 하겠지.
본진 피아크의 규모.
큰 규모만큼 그 활용도도 무궁무진할 것 같다. 펍도 있고 카페도 있고 소품도 판매한다. 이날은 구경만 하고 안녕.
1박 2일의 짧은 여행의 끝은 안 가면 섭섭한 부산 깡통시장에 들렀다. 기념품으로 양말과 수입과자를 사고 공항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번 주말도 부산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서, 저번에 가보고 인상 깊었던 곳들과 혹 더 가볼 만한 곳들을 다녀와 한번에 소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출장이 취소된 김에 그냥 저번 여행들을 중심으로 적어보았다. 그럼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