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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

동양의 뉴욕, 90년대 열기와 낭만을 그린 미장센

by 빵부장


첫 해외여행 목적지가 상하이였다. 공항에서 인민광장역으로 향하던 중 아끼던 디지털카메라를 소매치기당했다. 괴한이 다가와 돈을 내놓으라 했고, 무시하고 걸어가니 엄지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첫날부터 경찰서에서 모르는 언어로 분실신고서를 작성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 여행은 지금껏 향수로 남아있다. 서울에 한강이 있듯 상하이엔 황푸강이 가로질러 흐른다. 수상버스를 타면 몇백 원으로 동서를 오갈 수 있었다. 벌써 10년 전 얘기다. 상하이에 대한 그리움이 있던 차에 왕가위 감독의 드라마가 옛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다기에 냉큼 재생버튼을 눌렀다.


30부작. 숏폼에 길들여진 요즘엔 거의 폭력적인 분량이다. 진위청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번화'는 199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꽃을 피우던 시기에 선봉장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상하이다를 배경으로 한다.


『번화』는 꽃이 만발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개한 꽃은 언젠가 지기 마련이다. 극 중 주요 무대인 황허루는 상업의 상징 같은 공간인데 황허루의 고급 식당에서는 사업이 오가고, 곳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화려한 네온사인은 눈부시게 번쩍이며 번화의 정점을 드러내지만, 무색무취의 아름다움에 불과하다. 황허루 뒷골목에는 그런 허무함이 도사린다.


솔직히 말해, 남자 주인공 아바오는 세 여자를 말리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없다. 내실은 빈약하고 가오만 잡는다. 그럼에도 세 명의 여자가 그를 돕는다. 감독은 이 관계를 지그시 응시한다. 여자들은 그에게 자신의 행운을, 능력을, 정보를 내어주며 헌신하고 기대하고 상처 입는다. 그러나 바로 그 상처의 끝에서, 각자가 선택을 짊어지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 나설 때, 진정한 꽃이 만발한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인물은 별명 ‘미스 왕’으로 불리는 왕밍주다. 그녀는 대외무역공사의 엘리트로, 순수하면서도 똑 부러지고 야무지게 독립적인 기개를 갖춘 여성이다. 동시에 일일 드라마 속 ‘캔디형 여주’의 면모도 지닌다. 한편, 드라마 내내 상하이의 상징인 동방명주(東方明珠)에 대한 찬사가 반복된다. 1994년 완공된 높이 468m의 랜드마크, 상하이의 자부심 '동방밍주'. 이름이 같은 게 단순한 우연일까. 왕밍주는 곧 상하이를 여성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존재로 보인다.


극에 있어 언어적 디테일도 놓칠 수 없다. 대부분 대사가 상하이어로 진행되고 29명의 상하이 출신 배우가 캐스팅됐다. 남주가 쓰는 토박이 상하이어와 외지인들의 북경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외국인인 내가 그런 디테일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점은 아쉬웠지만, 그만큼 지역성을 중시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리역, 왕지뢰의 폭룡적인 비주얼


결국 번화는 왕가위가 고향 상하이에 바치는 러브레터다. 제작 과정만 보아도 7년의 준비와 3년의 촬영이라는 공들인 시간 속에 그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초반부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왕가위의 이름을 달고 있는 만큼 장면마다 영상미가 압도적이다.


특히 리리 역의 배우 왕지뢰가 등장하는 순간마다 고풍스러운 미장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마치 왕가위가 관객에게 “맛 좀 보라”며 으쓱거리는 듯하다. 영상미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고,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다 보면 외국인인 나조차 상하이에 대한 없던 향수까지 되살아난다.


가장 기억 남는 명대사 하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올라가는데 1시간,
떨어지는 데는 8.8초가 걸린답니다. 주식도 그렇죠.

이 짧은 대사는 아바오의 인생을 압축하는 동시에 사실상 30부작 전편을 관통하는 대사다.


진중한 시대극이 갑자기 『요리왕 비룡』으로 변주되는 회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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