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인가, 이성 잃은 정치인가
전쟁의 폐허 위에 리조트 단지를 짓겠다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잔혹하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10년간 미국 신탁통치 아래 두고, 주민 200만 명을 다른 곳으로 내보내겠다는 ‘GREAT 신탁’ 계획을 세웠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지구촌 '최악의 비극'이 벌어지는 곳이다. 언론 보도를 인용하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6만여 명이 사망했고, 14만5000여 명이 다쳤다. 주민 90%가 피란민으로 전락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가자지구 사망자 중 민간인 비율이 83%에 달한다면서 1989년부터 벌어진 각국의 전쟁·분쟁과 비교해 민간인 피해율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피와 눈물이 흐르는 살아있는 지옥.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휴양지 개발이라니 참으로 잔혹하다. 다 부서지고 모두 피란민으로 전락했으니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부동산 개발을 하겠다는 심산이다. 트럼프가 과거에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갖고 싶다거나, 우리나라 주한미군 기지 소유권을 요구한 점, 북한 해안에 콘도를 지으라고 한 발상과 다르지 않다. 땅을 차지하는 것을 정치적 성공으로 본다.
구상도 꽤 구체적이다.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는 1기 행정부 당시 백악관 선임 보좌관으로 중동 외교에 깊이 관여했고, 구상을 발전시켜 왔다. 쿠슈너는 모교인 하버드대 행사에서 "가자지구에는 마이애미 같은 훌륭한 해변이 있다"며 "가자 주민들이 일시적이라도 네게브 사막이나 이집트로 이주한다면 관광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신탁통치를 한다면 유엔의 승인과 주민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 구상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독자적으로 만든 그림이다. 가자지구 개발 계획에는 인공섬, 고급 리조트, 스마트시티, 데이터센터까지 들어 있다. 주민들이 살던 땅은 신탁에 넘어가고, 대신 그들은 ‘디지털 토큰’이나 몇 년 치 월세, 식량 지원으로 보상받는다. 핵심은 주민 전원의 이주다. ‘자발적’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사실상 강제 이주에 가깝다.
더 큰 문제는 팔레스타인의 주권이 완전히 무시된다는 점이다.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 은 사라지고, 주민들은 흩어지며, 그 자리에 외국 자본의 리조트가 들어선다. ‘두 국가 해법’이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슬로 협정에 따라 각각 독립된 국가를 세워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것을 뜻한다. 현재 유엔 193개 회원국 중 영국, 프랑스 등 145개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며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고 있다.
가자지구 신탁통치 아이디어는 이미 지난 2월에 거론됐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보고서가 언론에 공개됐다. 본격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움직임일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수교 논의를 중단한 사우디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낼 포석일 가능성도 있다.
국제사회도 이 문제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9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영국·프랑스·호주·캐나다 등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공식 인정하기로 했다. 바로 그 직전에 이번 보도가 나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완전 점령에 이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행정권을 가진 서안지구 합병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 행정부도 이스라엘 행보에 발맞춰 신탁통치 방안을 논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인사들이 유엔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입국 비자까지 취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리조트 개발 보도. 시기가 참 묘하다.
워싱턴포스트 원문 기사에 한 독자가 남긴 댓글은 아마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할 것이다. 그는 가자지구 재개발 계획을 두고 "이 계획은 괴물 같다.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다."라고 했다.
정치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측은지심이 사라진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라 폭정이다. 폐허 위에 세워야 할 것은 리조트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존엄이다. 그 질문 앞에서 이번 총회에서 처음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을 맡은 한국도, 국제사회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 기사 원문 <WP> Gaza postwar plan envisions ‘voluntary’ relocation of entire population (25.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