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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Jan 08. 2022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길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으며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고 있다. 이 책은 2021년 4월에 출간되었는데, 찾아보니 맨 처음 번역되어 읽히기 시작한 시기는 80년대인 것 같다. 이후 여러 다른 판본으로 만들어지다가, 평단 출판사에서 2012년에 출간했던 것을 표지를 갈아입혀 작년에 새로 펴낸 것 같다.


잉게 숄은 독일의 히틀러 통치 시절 뮌헨대학교 대학생들의 저항 공동체 '백장미'단으로 활동한 한스 숄의 누나라고 한다. (그리고 한스와 뜻을 함께 했던 여동생 소피 숄과도 자매지간이다)


무거운 내용이지만 서정적이고 쉬운 문체로 쓰여 책장이 스르륵 넘어간다. 원래도 역사에 관심이 많고, 나치 시대에 항거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시대에 대해, 그리고 이런 폭압의 상황에서 인간은 어때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어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왔다. 그러던  예기치 못하게 , 간접적으로 겪어야 했던 일들이 있었고 그러면서 새삼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와, 개인과 사회는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거기에 학문의 체계와 이론으로 대응하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고(예를 들면 레비나스), 르포와 글쓰기와 말하기로 항거하는 이가 있고(아렌트),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는 자가 있으며(본회퍼), 붉은 저항으로 젊은이의 푸른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이들이 있으니, 이들이 뮌헨의 '백장미'단이다. (갑자기 우리나라의 '불꽃추적단'이 생각난다. 이분들이 쓰신 책도 국어과 수업용으로 사놓고 차마 읽지를 못했다. 읽는 동안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조만간 읽기를 시도해봐야겠다)



한스 숄과 그의 친구들의 저항의 근거에는, 인간성 말살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본회퍼처럼 신앙이 뿌리가 되었다는 점이 일종의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세속화되고 화석화된 종교는 세간의 손가락질만 받을 뿐이지만, 진실한 믿음은 삶의 의미를 존재의 깊숙한 데에서부터 바꿔놓으며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는 걸 한스와 소피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불안한 정세 속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소피는 교회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고, 창조주가 부려놓은 자연 속에서 생명의 경이를 발견한다.


젊은이들은 신학과 철학을 놓고 토론하고, 유일신이 추동하는 역사의 줄기를 가늠하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나치 정부는 악독한 통치를 거두지 않고 사회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사람이 사람을 감시하게 하고, 말 한 마디라도 잘못 했다가는 끌려가서 종적을 알 수 없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정신질환을 앓는 어린 아이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고,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온갖 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은 전단지를 만들어 도시 곳곳에 뿌리는 일을 몇 번이고 감행한다. 그러자 정부는 대학생들을 전선에 투입하기로 하고, 그곳으로 떠나기 전 뜻을 함께하는 학생들과 후버 교수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이어간다.


후버 교수의 말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울 때, 홀로 그 일을 한다면 인간은 견뎌내기 어렵다. 그러나 뜻을 함께하고 무엇이 옳고 진실한 길인지를 서로에게 밝혀줄 수 있는 벗이 있다면, 그 길이 좀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우리라. 그런 이들이 있었기에 독일은 끝까지 미쳐 있는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있었고, 다음 세대에는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침묵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기에, 이처럼 삶을 던지며 맞선 이들이 있었기에. 악에 동조하고 그것을 묵인하고 혹은 무지의 죄를 범하며 자각 없이 '악의 평범성' 실천한 아이히만(마치 빌라도처럼, 이런 이들을 대표해 영원히 저주받는 이름이   아닌가 싶은) 같은 이들이 훨씬 많았지만 이들은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역사를 철저히 규명하여 악을 행하거나 동조한 이들을 단죄하는 데에 온힘을 쏟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덮고 넘어가려 하고 '민족 대통합'을 내세우며 화해를 종용하고 잘못을 봉합하려고 하는 우리나라의 방식과는 얼마나 다른가. 과거에는 식민국가로서 고초를 당하고 전쟁과 산업화의 굴레에서 그럴 여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고, 우리도 그런 길을 걷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 생각이 묶여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는 분위기도 여전한 것이 현실이다. 그건 교회 내에서도 예외가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혐오를 조장하는 온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뼈아픈 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런 물음은 절규로 읽힌다.


시편의 기자도 이미 오래 전에 이렇게 고통스럽게 노래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 일어나십시오.
오만한 자들이 받아야  마땅한 벌을 내리십시오. 주님, 악한 자들이 언제까지,
악한 자들이 언제까지 
승전가를 부르게 하시겠습니까?

사악한 자들이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이 모두  거드름을 피웁니다.
주님, 그들이 주님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님의 택하신 민족을 괴롭힙니다.
그들은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고,
고아들을 살해하며,
주가  본다. 야곱의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다하고 말합니다.

백성 가운데서 미련한 자들아,
생각해 보아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언제나 슬기로워지겠느냐?
귀를 지어 주신 분이 들을  없겠느냐?
눈을 빚으신 분이   없겠느냐?
 나라를 꾸짖으시는 분이 벌할  없겠느냐?
 사람을 지식으로 가르치는 분에게 
지식이 없겠느냐?
주님께서는, 사람의 속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
‭‭
시편‬ ‭94:2-11


시편 기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고뇌로 몸부림한다. 마치 신도 도덕도 양심도 없는 것처럼 함부로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이 고통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탄식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의문으로 시작한 노래는 작은 소망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


주님, 주님께서 꾸짖으시고 
주님의 법으로 친히 가르치시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재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시고 
악인들을 묻을 무덤을  때까지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주님이 소유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판결은 반드시 정의를 따를 것이니,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 모두 정의를 따를 것입니다.
‭‭
시편‬ ‭94:12-15‬


정의와 정직이 비로소 자리를 찾는 때를 소망하며, 그는 기다리고 인내한다. 그러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쉽지 않고 많은 희생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혹은 주변의 직,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다가도 온갖 혐오의 말들로 얼룩진 온라인 공간을 보면, 행여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 염려스럽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바른 양심과 꺼지지 않는 빛을 간직한 사람들의 작은 행동이 소중한 것이겠지. 우리가 주고받는 작은 온기, 토닥거림, 꺾어진 무릎을 일으켜세워주는 모든 몸짓들. 진실한 마음, 긴장을 풀어주는 유머감각, 유쾌한 눈빛, 건강한 정신.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리라.


그래서 좋은 친구들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필요하고, 진실을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귀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악의 소용돌이에서 미움과 증오 없이 마음을 지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럼에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결국 그런 길이 되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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