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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에이치 Apr 27. 2020

그릇



  어릴 적 대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살 때에는 많은 식구들 때문에 그랬던 건지 대부분은 멋없고 예쁘지 않았던, 따뜻한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것처럼 밉살스럽고 차가워 보이는 스뎅 그릇에 밥과 국을 먹었다. 먹다 보면 금방 식어 버리는 그 그릇에 담긴 음식들, 뭐든지 느린 꼬맹이였던 난 언제나 끝까지 먹지 못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 온 꽃무늬가 들어간 접시들이 가끔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날이나 명절에만 쓰였고 일상적으로는 아무런 영감도 주지 않는 막접시 같은 것들이 쓰였다. 

찬장 속에 박혀 있던 예쁜 그릇들이 특별한 날에만 쓰이는 게 난 너무 싫었다. 수학여행을 가거나 서울 나들이를 가면 인사동에 들러 그릇이나 아버지에게 쓰일 술잔 같은 것들을 사 오곤 했다. 술 드시면서도 기분 좋으시라고- 돈이 없으니 물론 싸구려 도자기들이다. 지금 보면 고급지진 않아도 어린 학생이 고른 거 답다. 

  열아홉 살 이후로 대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나의 시간을 살며 고군분투했고 그렇게 흘러 흘러 내 나이 마흔을 조금 넘긴 지금에도 그 그릇이랑 술잔들은 아직도 여전히 친정집 주방에서 종종 쓰임을 다하고 있다.


  아까 설거지를 하는데 문득 우리 집에 있는 그릇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다지 많지 않은 내 그릇들. 값이 꽤 나가거나 그렇게 훌륭한 것들은 아니지만 대가족과 어울려 살 때보다는 그래도 나름 품위가 있다. 난 일상에서 늘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쓰려고 노력한다. 특별한 날은 중요치 않다. 살아있는 매일매일이 특별한 날의 연속 아닌가. 단아한 공기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슬고슬한 밥을 담고 적당히 예쁜 접시에 끼니때마다 열심히 만든 요리들을 담아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아이들과 남편의 입이 오물오물 한껏 바빠지고, 맛있게 먹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힘들어도 언제나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마치 먹을 때 귀한 시간을 함께 먹는 것같이.


나한테 그릇은 그런 존재이다. 

마음의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일상의 오브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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