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짓다 보면 블라블라
친정 엄마는 아직도 나에게 묻는다. 가족도 있는데 밥은 잘 해 먹고 사느냐고-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면 열심히 밥상도 차려 드리고 맛있게 잘 먹었다며 인사도 곧잘 하시더니, 어느 날 통화를 하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데 무척이나 서운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입이 짧고 먹는 것에는 도통 취미가 없었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늘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보셨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꼬맹이의 입에서 생각 없이 툭 내뱉어진 재료들로 맛있게 요리된 음식들이 종종 식탁 위에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대가족 틈에서 전투력이 없던 내게 식탁 위의 내 것을 사수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여 보겠다고 알고도 늘 그렇게 애쓰셨던 엄마였단 걸, 내 아이들을 낳고서야 깨달았다.
성인이 되어 나의 시간을 사는 동안에는 자취하며 한두 끼 겨우겨우 그것도 대충대충 때우며 살기 일쑤였다. 어떤 날에는 씹어 삼키는 것도 뭔가 복잡하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았고 한 끼 식사가 캡슐 한 알에 들어 있어서 씹지 않고 그것만 꿀꺽 삼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정도로 먹는 걸 즐기지 않았던 나였기에 엄마는 언제나 먹지 않고 삐쩍 마른 나를 늘 못마땅해하셨다.
결혼을 앞두고 나에게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늘 허약했던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건강하게 잘 살아내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남편의 건강도 결국 아내인 나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먹는 걸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뒤척이던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결혼 후 어설프게 밥을 짓기 시작했다. EBS 요리프로를 즐겨 보며 본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했고 김치도 담그고 치즈도 만들었다. 그러다가 외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떤 음식이든 직접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말 뭐든지 다 만들어야 했다. 어느 날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소보루 빵이 먹고 싶어 런던 시내 빵집이란 빵집을 모조리 뒤졌는데도 못 찾아서 결국 만삭인 내가 직접 만들어야 했다. 뱃속의 아가가 너무 먹고 싶었었는지 아니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의 열정은 지금 와 생각해봐도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뭔가를 담그는 걸 좋아하고 나눠먹는 것도 참 좋아한다. 이제는 된장과 간장도 직접 담글 줄 알고 매실청도 담가 먹으니 정말 살림꾼이 다 되었다. 이웃들과 친구들과의 나눔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요리 덕분에 진짜로 건강해지고 살도 많이 붙었다. 이제는 편식도 하지 않으며 먹는 즐거움이 뭔지도 너:무 알아서 탈일지경이다.
때때로 요리하는 것이 너무 귀찮고 싫을 때가 있다. 남편과 아이는 내가 해주는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외식할 때마다 괜히 먹었다고 말하기 일쑤였고 차라리 집에서 먹는 게 더 좋겠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시나브로 외식이 거의 없어졌고 늘 주방에서 땀 뻘뻘 흘리며 매 끼니때마다 애쓰고 있는 내 모습이 어느 순간엔 정말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한테 나의 힘듦을 이야기했고 그에게서 재밌는 제안을 하나 받았다.
식당에서처럼 우리 집 주방에서도 내가 요리를 하면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리가 하기 싫은 날엔 군말 없이 외식하고 대신에 한 끼는 깎아주고 두끼에 각 8천 원씩 주겠다는 거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언젠가 먹는 걸로 작은 나의 가게를 갖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돈을 받고 음식을 하면 어떤 기분일지 설레기까지 했다.
돈을 받으니 간사하게도 그간의 힘듦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고 메뉴를 좀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음식도 더 정성스레 만들게 되었고 소꿉장난 같지만 작은 프로젝트 같아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받은 돈으로 장도 보고 짬짬이 쌈짓돈도 만들어 볼까 궁리하며 두근거림을 즐겼다. 요리가 다시 즐거워졌지만 얼마간 하다 보니 해이해진 남편이 현금이 없다며 끼니때마다 계산하던걸 미루고 다음날에 한꺼번에 주기도 했고 그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많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내가 마치 외상값 받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결국 용두사미로 내가 끝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름의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제안을 해준 남편이 고맙다.
나는 매일 밥을 짓는다.
밥을 짓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야 된다는 것, 어느 때엔 조급함이 음식을 망칠 수도 있고 어떨 때엔 마냥 느긋해선 안된다는 것- 대충 했다가는 대충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요리할 때의 불의 완급조절처럼 살면서도 얼마만큼의 완급조절을 했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진다.
여러 가지 재료를 알맞게 맞추어 적절한 방식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 사전적인 의미의 요리이다. 시간을 들여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매 끼니때마다 식탁에 올린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요리란 요리하는 사람의 시간과 정성까지 같이 먹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고 요리를 하는 것이 나에게는 인생 최대의 도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리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이제는 뭐든지 후딱 만들어 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항상 거칠고 아이 같은 엄마랑 통화를 할 때면 요리할 때 불의 완급조절처럼 내 목소리의 완급조절도 필수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딸인데도 여전히 잘 안 먹고 아픈 아이로만 생각하시는 통에 한숨을 크게 쉬고 전화를 걸어야만 기분 좋은 통화를 이어갈 수가 있다. 이 마저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되는 것들이다. 이전의 나였다면 분명 다툼으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에 겨울방학을 하고 난 후 코로나로 인해 무채색을 벗고 초록을 입은 오월, 아직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는 딸과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야 하는 상황들로 복닥복닥 아이들과 밀도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영역을 정해서 열심히 밭을 가꾸는데 에너지를 쏟고 있다. 삼시 세 끼 차려먹는 밥상에 엄마의 심적 여유만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식탁이 될 텐데 아이들한테 조급한 엄마여서 미안한 요즘이다.
밥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알아지던 개똥철학들이 적용되지 않을 때가 많은 요즘, 생활 방역으로 전환되었다 하더라도 안심할 순 없는 상황에서 나도 숨좀 쉬게 가끔은 남이 해준 밥이 먹고 싶다. 언제쯤 안심하고 편하게 외식할 날이 올는지.. 그래도 힘을 내어 한번 기지개를 켜고, 냉장고에 쟁여둔 열무랑 얼갈이를 꺼내어 다듬어야겠다.
마트에 갔더니 엄청 저렴하길래 나도 모르게 몇 단 사 와버렸다.
빨리 김치를 담그고 저녁엔 오랜만에 딸아이가 특히 좋아하는 월남쌈을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