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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에이치 May 12. 2020

땅에서 얻는 즐거움


  성실히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가꿔주면 흙으로부터 내가 흘린 땀만큼의 정직한 보상을 받는 것 같다. 흙속엔 지렁이 쥐며느리 개미나 지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진리가 다 들어있는 것만 같다. 뿌린 씨앗이 열심히 발아해 땅을 뚫고 흙 위로 올라와 싹을 틔우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있다면 올 한 해도 우리의 대지를 따뜻하게 잘 품어주길 바란다.

  그렇게 열심히 싹을 틔워 빛을 본 새싹들 사이사이로 잔뜩 자라나고 있는 풀들이 영양분을 다 가져가 버릴까 봐 계속 검질을 한다. 매어도 매어도 끝이 없다. 쪼그리 방석에 앉아 열심히 호미질을 하는 내 모습이 이젠 그리 낯설지 않다.

가뭄에 단물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던 참을 수 없었던 존재의 가벼움..차라리 공중분해되어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밥값을 못하면 굶었다. 내 자신에게 내리는 벌 같은 거였다. 힘들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엔 아무 때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밭에 가서는 맨발로 흙을 밟고 아버지를 도와 감자며 고추며 이것저것 심는 것을 도왔고 어떤 때엔 풀을 메었다. 논에 가서는 어떤 계절엔 같이 벼를 심었고 어떤 계절엔 추수를 도왔다. 그리고 분주히 움직이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기도 했다. 언젠가는 머리가 복잡해 뒤척이던 새벽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캄캄한 마당으로 나갔다. 쌀쌀한 밤공기가 머릿속을 식혀주는 듯했고 고개를 돌리니 수돗가 옆에 창고가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매운 고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간 후 쭈그리고 앉아 엄마가 널어놓은 고추를 집어 가위로 수분이 조금 빠져나간 고추의 끄트머리를 싹둑싹둑 자르고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텅 빈 새벽 공기 속에서 예민하게 허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가위질 소리에 마당에 있던 뒷간으로 소변을 보러 나오신 할머니가 침침한 노란 불빛 아래 긴 머리를 풀어헤쳐서 산발이 된 채로 가위질하던 내 뒷모습을 보시곤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나를 귀신으로 착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아무 때고 올라가서 가져온 시골집 흙냄새의 정취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래도 얼마간의 힘의 원천이 되어 주곤 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 사느라 잘 몰랐다. 런던에 살 때 첫째를 임신하고 입덧이 굉장히 심할 때였다. 친정엄마가 해준 열무김치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어서 결국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금방 받은 커다란 택배 상자에는 이것저것 가득 들어 있었는데 다른 건 냄새도 못 맡겠더니 열무김치만은 신기하게도 괜찮았다. 얼른 접시에 담아 한가닥 입에 넣었을 때 그것은 그냥 열무김치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땅에다 뿌린 씨앗이 흙속에서 열심히 싹을 틔어 뚫고 살아난 야리야리한 열무였다. 열무를 버무린 고춧가루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부모님 집의 따뜻한 방하나를 무조건 꿰차고 몇 날 며칠을 그분들의 손아귀에 맡겨져 자:알 말려진 빨간 고추 들일 것이다. 양념장에 넣어 버무린 양파와 마늘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렇게 만들어진 머나먼 고국에서 건너온 엄마의 열무김치.

마치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진한 기운이 감도는 흙의 에너지와 공기를 함께 먹는 것 같았고 씹어 삼키는 동안에도 그것이 나의 몸의 에너지로 순식간에변해 마치 그동안의 허약해져 있던 기를 땅땅하게 충전 받은 기분이었다. 물론 입덧으로 단 한 젓가락뿐이었지만 그런 강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보내주시는 것들 중에서 흙에서 나는 대부분의 농작물들은 그렇게 그분들의 땀과 노력과 시간을 함께 먹는 것이라 생각해서 더더욱이 그랬던 걸까.

  

 나도 이젠 땅에서 얻는 즐거움이 뭔지 안다. 비라도 한번 내리면 내일 아침에 우리가 심어놓은 토마토와 야채들이 얼마나 커져있을지 상상한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절로 신이 나고 즐거워진다. 이른 봄이 되면 산에선 쑥이 올라오고 냉이가 피어나고 고사리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숨바꼭질하듯 깊은 가싯덤불속에 숨어있다. 쑥을 뜯고 냉이를 켄 날엔 봄도 같이 먹는 것 처럼 풍성한 식탁이 만들어진다. 푸른 잎채소를 좋아하지 않는 네 살 난 작은 녀석도 빵처럼 맛있는 전이라고 해서 ‘전빵’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는 쑥전, 된장국에 조개를 넣은 쑥국, 쫀득쫀득 쫄깃한 쑥개떡도 해 먹을 수 있다. 친정엄마가 담그신 고추장과 내가 담근 매실액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 향긋한 냉이무침, 두부를 많이 넣고 끓인 보글보글 달래냉이된장찌개는 또 어떠한가.


  코로나 19로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딸. 집에만 있는 요즘 갑갑증을 느낄 때면 숲이든 벌판이든 고사리며 냉이, 쑥, 달래 등을 뜯으러 나간다. 딸아이와 함께 하니 즐겁다. 함께 노래도 부르고 엉뚱한 얘기도 하고 싸온 간식도 나눠먹고 그녀와의 데이트가 즐겁고 소중하다. 환경에 관심이 많아 평소에도 쓰레기 줍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녀석은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들에 대한 즐거움 또한 아는 녀석이다. 나보다도 더 열정적인 아이를 보며 꼬물거리던 뱃속의 아기가 언제 저렇게 컸나 대견하기도 하지만 묵묵히 흘러버린 그녀와 나의 시간속에서 혹시라도 잡지 못하고 흘려보낸 내가 놓친 시간은 과연 없었을까..생각해본다.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엄마가 더더더 잘해줄걸.

딸아이와 꺾어온 고사리

  땅에서 자연에서 얻어온 것들을 다듬고 있을 때면 그것들을 얻어올 때의 즐거움은 슬쩍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어떤 때엔 뭐하러 이렇게까지 많이 해왔을까 싶고 그런 생각이 들면 더뎌지기 일쑤니 밥이 늦어질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져 버린다.

  그러나 그런 맘도 잠시, 다듬기가 끝나고 깨끗이 씻어서 데치고 먹을 만큼씩 소분해서 냉동실로 냉장실로 옮겨 쟁여둔다.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만큼이나 뿌듯해지는 내 마음, 거실에서 놀고 있는 딸아이한테 소리친다.

"봄아, 우리 다음에 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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