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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02. 2019

가장 기대하지 않은 모습의 런던이라도

그저 잠시 스쳐갈 뿐인걸

루턴에서 눈을 뜬 아침, 창밖은 새하얗다. 예쁘게 눈이라도 왔으면 좋았으련만, 구름이 낮게 깔려 삭막하게 하얀 하늘.


여행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난 날씨 운이 없어"라고 말해봤을 것 같지만,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난 진짜로 여행할 때 각종 타이밍 운이 거지같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런던만 해도 도착하는 날 새파랬던 하늘이 런던 시내 놀러 가는 날은 구름이 꽉꽉 꼈고, 다음날 출발할 때 다시 청명한 파란 하늘이었다. 줄줄이 열거하기 구차스럽지만 말 나온 김에 몇 개만 말해보자면 두 번이나 찾아간 교토 청수사는 두 번 다 공사 중이었고, 한 달 유럽 여행에 갈 때 올 때 비행기에서 생리 당첨은 말할 것도 없고, 시애틀이며 제주도며 내내 흐리다가 공항 가는 날 겨우 맑아지는 하늘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구질구질하니 그만 쓸게요.


원래는 런던 시내를 아예 안 볼 생각이었지만 루턴에 도저히 할 게 없고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결국 비싼 값에 왕복 기차표를 끊었다. 런던 시내에 도착하니 비가 왔다. 2015년에 쓰고 남아 가지고 있던 지폐와 동전들은 화폐가 바뀌면서 무용지물, 은행에 가야 했다. 서머셋 하우스 광장은 며칠 뒤 개장하는 아이스링크 공사가 한창이었다. 날이 뿌예서 멀리 보이는 런던아이도 하나도 안 예뻤다. 거봐, 나 운 없지.



3년 전에 들뜬 마음으로 찾았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까지 반가운 마음으로 걸었다. 너무 커서 미처 둘러보지 못했던 두 동을 다 둘러보고, 똑같이 터바인 홀에 오래 머무르고, 6층 카페의 같은 자리에서 정확히 같은 뷰를 바라보며 같은 커피를 마신다. 10층 전망대에서 야경을 기다리다가 지루함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와버렸다.



괜스레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사우스 뱅크를 따라 걸었다. 런던에서 만난 친구들, 그들과 같이 갔던 식당들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혼자서 새로운 곳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친구와 갔던 펍에 가서 안전하게 피시 앤 칩스를 주문했다. 지난 추억이 없었다면 그저 춥고 외로울 거였다. 하루키가 그랬던가, 훗날 마음을 덥혀줄 연료로 쓰기 위해서라도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는 편이 좋다고. 추억을 쌓아가기만 하던 시절엔 잘 몰랐는데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


여행할 땐 늘 "여기까지 왔는데.."와 "언제 다시 와보겠어"의 강박에 시달렸다. 귀찮은 마음을 억누르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걷고 또 걸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멋진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만 더 걸어가면 좀더 예쁜 카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

조금만 더 걸어가면..

그렇게 걷다 보면 늘 무리하곤 했다.


결국 그리 대단한 걸 보지도 못했으면서 여행에서 돌아오면 앓아눕고야 마는 내가 퍽 한심하고 멋이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억지로 여유로운 척하기도 했다. 여유로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을 아까워 하지 말자고, 에어비앤비 방 침대에 반나절을 누워 창밖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사실 초조해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마음을 달랬다. 겨우 촌스러워 보이기 싫다는 촌스러운 마음으로 이제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니, 나는 정말 촌스러운 사람이다.

'여기까지 왔는데'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만.


무리해서 런던 시내로 나와 아는 데만 가서 하루를 다 쓰고 온 사람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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