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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26. 2018

여행의 반은 기다림의 일

착륙까지 열세 시간, 숙소까지 일곱 시간

다시 비행기 안. 창밖이 보이니 역시 신경이 쓰인다. 낮달이 보이면 기뻤다가 사람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내가 달을 제일 좋아해. 달을 보면 내 생각이 나라고 주문처럼 외웠다. 창밖으로 구름이 눈밭처럼 가득 깔리면 요상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그래,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오로라를 보는 상상을 했다. 추운 밤 폭신한 이불을 두르고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옆에 멋진 남자애라도 있으면 괜히 연애감정도 느껴보고, 혼자 나오면 사람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야지. 좋은 걸 봐서 생각이 났다고, 좋은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초록빛 광활한 하늘 아래서라면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날 것도 같다.

수면제 반쪽이면 13시간 비행의 반 이상은 견뎌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이 3시간만에 무너졌다. 이제 남은 건 겨디는 일 뿐. 광저우 바이윈 공항에서 런던 히드로 공항까지 열 세 시간, 여행의 반은 기다림의 일이다.


2011년에 멈춘 아이팟 플레이리스트로 노래를 듣는다. 크게 상관 없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그때쯤 이후로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의미일까. 내가 이렇게 중얼거리면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하며 너스레 떨 사람을 적어도 세 명은 알고 있다. 보고싶은 친구는 "원래 그렇다더라"고 덤덤히 말했을 것도 같다.

아니 몰라. 내가 뭘 알았던가.


악명 높은 히드로 공항에 편도 티켓을 들고 도착해서 조금 겁먹었다. 하지만 나는 숙소도 무려 루턴 공항 근처. 난 너네 영국에 별 관심 없어, 런던은 그냥 내 마음의 안식처 아이슬란드로 가는 길목일 뿐이야 하는 태도로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똑같이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해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밤이 깊도록 짐이 도착하지 않았던 지난 여행의 악몽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무사히 공항을 빠져나오는 듯했으나 숙소로 가는 루턴행 버스를 1분 차로 놓친 나는 꼼짝없이 발이 묶여버렸다. 없는 계획에 그나마 짤막짤막 얻어온 정보들도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이유들로 물거품이 되어 하염없이 버스만 기다리다가, 영국 땅을 밟은지 일곱 시간 만에야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나의 작은 방에 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라곤 하지만 이번엔 좀 심했다. (라고 매 여행마다 생각한다.) 원래 여행의 반은 기다림의 일이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실은 이쯤되면 조금 섭섭해진다. 오늘도 순진하게 내일에 기대를 걸어보는 무모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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