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도 여행의 일부일까요?
별로 설렌 것도 아닌 주제에 무계획 불안증으로 잠을 설치고 생각보다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도심공항을 지나 인천공항을 거쳐 비행기에 올라 연착 소식에 지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기내식 서비스로 한바탕 소란스러워진 기내에 잠에서 깨서야 비로소, 아무런 사유도 없이 텅 빈 머릿속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힘들다거나 가방이 무겁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냥 정해진 절차를 따라 익숙한 길을 걸어온 느낌. 설렘이 없는 여행의 시작.
당장 여행의 목적지로 향하지 않기 때문일까? 여행의 목적지인 아이슬란드로 가기 전 런던에서 애매한 이틀을 보내기 또 전에 광저우에서 일박을 쉬어가기로 했다. 보통은 이렇게 항공사에서 환승 호텔을 제공하는 장시간 경유인 경우 시내 구경이라도 하고 간다던데, 나는 애초에 그냥 호텔 근처에서 책이나 좀 읽다가 푹 자고 비행기를 타겠다는 심산이었어서 그랬던지 여행 가기 전 할 일이 하나 늘었다 정도의 기분이었던가.
창문이 없는 비상구 좌석에 앉은 탓인지 잠만 쿨쿨 자게 된다. 자고로 비행기 안이란 상념의 공간이 아니었던가. 기내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사사로운 생각들이 연이어 떠오르고 머릿속 가득 부풀어 차오른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과 상념에 빠지게 되는 것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사실 크게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예상외로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한 광저우의 환승 호텔은 말만 호텔이지 정말 '방'밖에 없었다. 낮잠 한숨 자고 둘러보러 나가도 갈 곳 하나 보이지 않아. 공기는 매케하고 근처 식당들은 대가족이나 와서 먹을 법한 곳들 아니면 신용카드 따위 받아주지 않을 동네 식당이었다. 호텔 옆 구멍가게에 가서 먼저 와있던 한 서양인 여성을 따라 컵라면을 열심히 골랐다. 밀크티를 집어 든 차에, 먼저 계산하던 여성분이 내민 신용카드가 무안하게 지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녀가 다시 내민 지폐를 들고 다급히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직원을 보아하니 이 분도 위안화는 없나 보다. 당황한 내가 영어로 "신용카드 안 된대요?"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동시에 가게 직원이 두둑한 위안화 지폐를 꺼내 세기 시작했다. 10불쯤 냈나 싶은데 잔돈은 괜찮다는 여성분의 말은 아무래도 통하지 않고, 잔돈 안 받기를 포기한 표정의 여성분은 내가 고른 음식들까지 나서서 흔쾌히 계산해주었다. "어차피 이 돈은 저한테 쓸모없는데요" 하면서. 사실 이천 원 정도 했으려나 싶지만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 호텔 방에 돌아와 이름도 미처 묻지 못한 초면의 외국인이 사준 컵라면에 물을 부어 먹으며, 언제나 준비 없는 여행이란 사람들의 작은 친절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시작했지만 아직 여행지에는 다다르지 못한 밤. 호텔방에서 TV를 돌려보고 책을 읽으며 심심하지 않게 하루를 쉬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TV 소리는 답답하고, 책도 어쩐지 잘 읽히지를 않고,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넷플릭스도 안 되는 인터넷 환경에 외로움보다 먼저 심심함이 못내 괴롭다. 좀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역시 멋진 모습의 나를 상상하는 걸 그만두는 편이 빠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