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 변한 듯 그대로인 완벽한 워커블walkable 시티, 레이캬비크
부지런한 사람들이 한차례 빠져나간 아침 시내 8인실 도미토리에서 눈을 떴다. 지독한 야행성인 내게 유럽 시간은 시차적응이 필요없는 완벽한 루틴. 비행기 연착으로 새벽이 다 되서 도착한 레이캬비크는 아직 설렐 건덕지도 없다. 이름도 잊어버리고 만, 같은 숙소를 예약한 같은 비행기 탑승객이라는 별 것 아닌 공통점으로 친근한 동행이 되어준 친구의 투어 일정에 화창한 하늘을 기원해주며 나도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한다.
날이 흐리다. 아침식사와 커피를 한 큐에 해결하러 나왔지만 마땅히 문 연 카페가 없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지만 괜히 기분 좋은 척해본다. 아주 그럴싸하지도 아주 최악도 아닌 게 딱 내 인생 같다고 괜한 생각도 해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의 기운에 서둘러 카페를 나섰지만 비가 오고 만다. 눈인가 하고 설렜는데 진눈깨비가 흩날리다가 다시 비가 내린다. 젠장.
입장료를 받지 않는 미술관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아쉬운대로 구경한 아트샵에서는 3년 전에 팔던 것과 똑같은 엽서와 책자를 팔고 있었는데, 그게 왠지 우습고 반가웠다. "안녕 친구들, 나는 아이슬란드에 다시 왔어. 우리가 왔을 때 본 엽서를 아직도 팔고 있어, 기억 나니?" 하면 "응 기억나! 아이슬란드에 다시 갔다니 정말 멋지다. 보고싶어." 하고 반가워해주는 친구들의 말을 상상해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괜스레 다정하게 느껴지는 도서관에서 읽히지 않는 책들을 몇 권 골라와 뒤적이며 구경하다가, 마침내 개어오는 하늘을 보고 흥분해서 뛰쳐나왔다. 잔뜩 흐린 날씨로도 충분히 레이캬비크에 다시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와는 다른 문제다. 하늘이 개고, 기분이 거짓말 같이 좋아지고 나서야 충만하게 느껴지는 따뜻하고 반가운 감정. 파란 하늘만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다닌다.
3년 전 어느 봄날의 레이캬비크와 지금, 가을의 레이캬비크는 조금은 다른 듯, 또 여전하다. 곳곳을 채우는 그래피티도, 공사중인 건물들이 어딜 가나 있는 것도 이 도시답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고 자라며 한 자리에서 지켜본 서울은 금방금방 모습을 바꿔서, 이전엔 어땠더라 하고 떠올려봐도 기억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게 '발전'이라고 하면 조금은 할말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발전없음이라고 믿지 않는 느림보니까. 그대로인 도시의 모습에 반가워하고, 달라진 것들을 조금 아쉬워도 해보고 흥미롭게 바라보며 지치는 줄도 모르고 걸었다.
레이캬비크는 작은 도시라서, 걸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대단한 볼 것이 있나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걸어서 이 멋진 도시를 다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벅차오른다. 파란 하늘이 머리 위를 감싸주는 날은 더 그렇다. 하얀 낮달까지 떠있는 하늘 아래 걷는 레이캬비크는 더할나위 없이 완벽해!
저녁엔 앞으로 열흘을 함께 지내게 될 친구들을 만났다. 매일매일 기다란 테이블에 모여 북적이며 먹게될 아홉 번의 저녁 식사에 조심스레 기대를 걸어본다. 한동안은 달이 떠있을테니까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