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저녁을 먹다가, 블록체인 얘기가 언뜻 나왔다. 내가 왓챠에 영화평을 계속 써와서 보상 CPT를 받았는데, 한화 가치로 10만 원 정도가 되더라는 이야기를 하니 아빠의 얼굴에 번뜩 색이 돌았다. "네가 글을 잘 써서 돈을 받는 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우리 가족은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지내는 나를 비난하거나 닦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류의 기쁜 기색을 요즘은 더 서글프게 느끼고 있다. 아니 아빠, 이건 돈을 버는 게 아니고 그냥 이벤트성 보너스 같은 거야. 아 그렇구나. 건조하고 짧은 실망. 그 틈에도 조금은 자랑을 하고 싶었던지 내 영화평이 좋아요 수로 1등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조잘댔다. 정확히 3초 뒤에 밀려오는 현타.
비난도 닦달도, 이제는 응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봐 주는 가족들. 그 속에 한심한 눈빛이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어느 쪽이어도 속이 상하긴 마찬가지니까,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너무 포기한 상태로 나자빠져 있으니 모두가 같이 포기한 척해주지만, 실은 나도 가족도 정말로 아주 포기해버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버리지 못한 희망의 끈이 가만히 만져지는 날은 그걸 붙들고 몰래 울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만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피프티 피플>엔 오십여 명의 인물이 각각 자신의 이름을 소제목에 명함처럼 내밀고 등장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챕터 안에서 그들은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확장한다. 이를테면 50여 명이 주인공인 이 소설에 등장하면서도 자신의 챕터가 없고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인물이 있다. 누군가의 딸로 나온 이 여성 캐릭터가 나와 꼭 닮아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어찌어찌 시기를 놓치고 집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낸다. 아내와 낮 시간 문화센터에 다니는 아빠는 딸에게도 문화센터에 다녀보라고 권유하지만 '낮에 뭘 하긴 좀 부끄러워' 하고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용기는 내지 않을수록 낼 수 없게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 그래서 삶의 모든 것에 주눅이 들어 있는 사람. 꼭 내 삶을 들킨 것 같았다. 작가가 이 인물을 만들어놓고, 비난도 조롱도 평가도 하지 않는 것이 내심 고마웠다. 소설 속 아빠의 입을 빌려 그녀를 안쓰러이 여겨주어 조금 울고 말았다. 끝내 이름이 없다 하더라도.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저 인물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한데, 절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주변 인물의 이야기는 쓰이지 않는다. 그에겐 변론의 기회조차 없다. 늘 주인공 같은 기분으로 살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얘기도 영화로 드라마로 소설로 언젠가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날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주인공이 한심한 영화를 봐도 '저 사람은 그래도 저런 게 있네'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름도 사연도 없는 누군가의 가족일 뿐이 되어 남의 이야기 언저리를 맴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 자신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정말 바닥이라고 느껴질 땐 바닥에 대해서 쓰지 않았다. 적어도 이건 아주 바닥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바닥을 어느 정도 치고 올라오고서야 비로소 몇 마디 보탤 수 있었다. 처음으로 정말 바닥에서 쓰는 바닥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