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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May 23. 2019

인생은 늘 '이치(1)'와 '니(2)' 사이

와타야 리사 장편소설 <제멋대로 떨고 있어>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일본 영화 <제멋대로 떨고 있어>를 기억해두고 있다가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다. 알고 보니 학창 시절 왠지 몰라하며 공감했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과 동일 저자라서 내심 반가웠다. 말로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합적인 심리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훌륭해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다 읽어버렸다.


소설의 주인공 요시카는 도쿄에서 회사를 다니는 20대 중반의 여성이다. 그는 졸업 후의 생사여부도 알 수 없을 만큼 아예 모르는 사이에 가까운 학창 시절의 짝사랑 '이치'를 아직까지 마음속에 간직할 만큼 순수한 - 조금은 크리피한! 모태솔로다. 스스로 '오타쿠'라 자처하는 그녀의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에 하는 말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어리숙한 '니'가 나타나 돌멩이 하나를 퐁당 던져 넣으며 이야기에 가속이 붙는다.


요약하자면 그런 거다. 꿈속의 왕자님 이치 ('이치'는 일본어로 숫자 1의 발음과 같다)는 나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나와 독특한 취미가 비슷해서 말이 잘 통하기도 하지만 나를 조금도 이성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 반면 그저 발에 채이는 남자 중 한 명인 니('니'는 일본어로 숫자 2의 발음과 같다)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같은 나를 발견하고 좋아해 준다. 나와 비슷한 점은 하나도 없고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이해하려는 노력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나를 좋아한다.


  닿습니까? 아뇨, 닿지 않아요.
  내 것이 아닌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만 바라본 탓에,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것들은 무수한 시체가 되어 발밑을 굴러다니고 있어요. 빛조차 받지 못한 채, 내 발에 밟혀 뒤꿈치 모양으로 패어 있네요. 저 멀리 손에 닿지 않는 별님을 향해 손을 뻗는, 이 욕심 많은 인간의 본성이 인류를 진화시켜 온 걸까. 그렇다면 나 역시 인간인 이상,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항상 뭔가를 갖고 싶어 해야 할지도 몰라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비슷한 정도로 나를 좋아해 주면서 나를 잘 이해하고 나와 잘 통한다, 라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로맨스계 최대 난제. 그 명제에서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과감히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제 나름의 룰이 있을 터다.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가장 단순한 기준으로 나누자면 역시 결국 '내가 더 좋아하는 관계'와 '나를 더 좋아하는 관계' 사이의 고민일지 모른다. 나에게 헌신하는 다소 매력이 떨어지는 상대에게서 자존감을 충만하게 채우기를 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매력적인 상대에게 내가 조금 더 헌신하기를 택하는 사람이 있다. (매력의 기준은 주관적인 것임을 밝혀둔다.)


소설 속 요시카의 룰은 비교적 확고하다. 아니 적어도 확고했었다. 이치와 결혼하게 된다면 남편을 감시하는 간수 같은 신부가 되어 언제라도 떠나버릴지 모르는 이치를 보며 매 순간 마음 졸이겠지만, 그래도 역시 이치가 좋아. (참고로, 요시카 역을 맡은 마츠오카 마유 배우가 눈물을 똑똑 떨구며 혼잣말을 하다가 젖은 눈으로 싱긋 웃으며 '하지만 역시, 이치가 좋아!'라고 말하며 시작되는 영화의 도입부는 정말 끝내준다.)


어느 날 낮잠을 자던 중 이불에 불이 붙으며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감각에 각성한 요시카는 어른이 된 이치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동창회에서 만난 이치는 여전히 주위에 다소 무심하고 내성적인 왕자님. 요시카의 마음을 온통 뒤흔드는 그 무심함은 필연적으로 요시카의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니는 무시했던 화제에 이렇게 즐겁게 호응해 주다니. 그것도 새벽 네 시에.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 게 틀림없어. 사귀면 이야기할 게 분명히 많이 있을 거야. 하지만 이 허무함은 뭘까. 서로 통하긴 하지만, 이치가 나를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이 전해져 오기 때문일까. 마음이 통하면 통할수록, 두 사람 사이의 영원히 줄어들지 않는 거리가 점점 더 부각된다. 마음이 통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거기서 아무 케미도 생겨나지 않는데.


그런가 하면 요시카에게 있어 매력도 0에 수렴하는 니는 어떤가. 자신이 한심한 말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전형적인 흔남인 주제에 끈덕지게 구애하는 이 남자는 자존감 낮은 요시카의 마음 한 구석 빈자리를 파고든다. 왜냐면 그는 나를 발견해주었으니까. 그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니까.



  "어째서 나를 '너'라고 부르는 거야?"
  내가 묻자 이치가 내가 너무 좋아하는, 부끄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에토 씨에 대해 말해 줘,라고 하던 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토 씨에 대해 말해줘. 가슴에 빨간 포스트잇을 달고 있었을 뿐인데도 나를 발견해 준 사람.


소설을 다 읽고 난 나는 역시, '이치도 니도 아니야!'라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연애 경험도 없고 자존감도 낮으니까 자신을 발견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니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너를 알아볼 '구원자' 같은 건 사실 없고, 앞으로도 너를 알아봐 줄 더 나은 남자는 계속 나타날 거라고. 단지 너를 발견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준 미달의 니에게 정착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연애 관계에 있어서 어느 쪽이 자존감이 높은 선택인지 나는 줄곧 헷갈린다. 애초에 완벽하게 균형이 맞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멋지지만 나에게 무심한 상대를 아랑곳 않고 쟁취해내는 것이 자존감이 높은 것인지, 나에게 무심한 상대를 내쪽에서 역시 무시해버리고 나에게 잘해주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 자존감이 높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인생은 늘 이치와 니 사이를 부유하는 일인지. 이치와 니 중 한쪽을 단호하게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인지. 이치와 니가 결합된 (혹은 화끈하게 벗어난..?) 형태의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언젠가 정답에 가까운 답을 찾아가는 날도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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