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잭 홀스맨의 시니컬한 아웃사이더 다이앤을 대변(?)하여
넷플릭스 미드 보잭 홀스맨을 사랑한다. 자의식만 비대해진 한물간 TV 스타 보잭 홀스맨의 엉망진창 할리우드 라이프를 그린 시리즈다. 그리 경쾌하고 유쾌하지는 않다. 좋아하는 만큼 미워하기도 쉬운 주인공 보잭 홀스맨은 너무 많이 나같고 바닥이라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 않고, 이 드라마에서 내가 줄곧 말하고 싶은 인물은 단연코 다이앤이다. 뭔가 멋진 일을 하고 싶어 헐리우드에 온, 똑똑하지만 - 혹은 똑똑하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늘 겉돌고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는 30대 중반의 여성. 삶의 부조리를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부조리의 집대성 같은 헐리우드에 대해 내집단의 열망을 품고야 마는, 그러나 또 동시에 경멸을 숨길 줄 모르는 복합적인 사람.
좋게 말하면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는, 나쁘게 말하면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성향의 다이앤에겐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애인 - 곧 남편이 되는 미스터 피넛버터가 있다. 어쩌면 이름처럼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이 남자는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활기차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긍정왕이다.
시즌1의 네 번째 에피소드 '조이와 젤다 Zoës and Zeldas' 편에서 다이앤과 그녀의 전 남친 웨인의 대화를 통해 둘 관계의 핵심을 요약할 수 있다.
웨인: 지난 몇 주 동안 두 사람을 따라다녔는데, 당신이 함께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라고 확신해.
다이앤: 아니, 난 당신도 만나봤잖아. 물론 당신은 똑똑하고 세련되고 멋있어. 하지만 좀 못된 데가 있지.
(...)
다이앤: 피넛버터 씨는 나한테 잘해줘. 친절하고 관대하면서 내게 충실하다고.
웨인: 당신 문제가 뭔줄 알아? 당신은 누가봐도 조이인데도 불구하고 젤다가 되려고 한다는 거야.
다이앤: 꼬리표 붙이지마. 당신은 나에 대해 잘 몰라.
웨인: 당신이 원한다면 행복한 젤다인 척하면서 행복한 젤다 마을에서 행복한 젤다의 삶을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당신을 알아, 그건 당신이 아니야. 사람은 변하지 않아, 다이앤. 정말이야. 피넛버터 씨는 젤다야. 그는 행복하고, 근심걱정 없이 다정하지. 하지만 당신과 나, 우린 조이야. 우린 조이라고. 우린 냉소적이고 우울하고 못된 사람들이야. 당신 내면 깊은 곳곳의 어둠을 당신 머리만큼 큰 부리토 안에 숨겨둘 순 있겠지만, 언젠가 곧 드러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날 찾아와.
시니컬하고 부정적인 성향의 다이앤은 누가 봐도 낙천적 긍정왕인 피넛버터 씨가 때로는 버겁다. 기본적인 성향 차이도 있겠지만 이 사회, 특히 헐리우드에서 '시니컬한', 게다가 '여성'이 설 공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현실까지 인지하고 있는 다이앤에게 세상이나 삶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다. 반면 무슨 일이든지 "잘 될거야! 당신은 멋져! 훌륭해! 힘내!" 라고 외치는, 실제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며 늘상 행운처럼 혜택을 얻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누려온 미스터 피넛버터 방식의 격려와 응원은 때로 다이앤을 더 초라한 기분에 빠지게 할 뿐이다.
할리우드에서 작가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데다가 사회를 위해 보탬이 되는 일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들던 다이앤은 재난구호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업가에게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는 권유를 받는다. 위험한 전쟁지역에서 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쓰다니, 그녀에게 이토록 완벽한 일이 또 있을까! 여러 가지 망설임 -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아내와 함께 있고 싶은 미스터 피넛버터와의 여러 차례 논쟁 끝에 그녀는 재난구호 현장으로 떠난다.
그러나 다이앤에게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녀가 전기를 써야 하는 이 사업가라는 사람은 그저 자신이 '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취해있고 그것을 홍보하고 싶을 뿐인 사기꾼 같은 사람.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업적들을 내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이나 짓기에 바쁜 그의 '봉사'에 환멸을 느낀 다이앤은 결국 전기 작업을 그만두고 LA로 돌아온다. 자신이 그렇게 열망하던 올바른 일은 애초에 없었고, 그마저도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다이앤에게 미스터 피넛버터는 끊임없이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멋진 사람인지 얘기한다. 그럴수록 다이앤은 미스터 피넛버터에게 돌아갈 수 없다.
다이앤은 결국 남편에게 자신이 LA에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보잭 홀스맨의 집에 신세를 지며 엉망인 모습으로 지낸다. 보잭이라면 이 끔찍한 환멸과 엉망인 자기 자신을 터놓고 보여주고 얘기할 수 있다. 다이앤이 느끼는 자괴감을 모르는 미스터 피넛버터에게 이 상황과 자신의 감정을 하나하나 설명한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그걸 설명하려 애쓰는 자신만 초라한 기분에 빠지고 지쳐갈 것을 다이앤은 모르지 않는다.
보잭: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다이앤: 가야죠. 가야 한다는 건 알아요. 지금 당장 가서 침대로 기어 들어가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면 좋겠어요. 남편이 그냥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묻고, '근데 모노레일을 조지 모노레일이 발명했다는 거 알았어?' 하면 내가 '아닐걸' 하고, 그러면 그가 '발명은 안 했어도 완벽하게 만들었겠지' 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럼 난 "떠나서 미안해,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서 미안해'라고 말할 필요가 없겠죠. 대신 그냥 '오늘 하루도 좋았어'라고 하면 남편이 말하는 거예요, '사랑해'라고.
여기까지 나는 줄곧 미스터 피넛버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를 미워했다. 그의 단순명쾌함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나를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니까. 그의 긍정적인 사고는 나를 조금도 이해해주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단순한 사람들이 해맑은 얼굴로 악의 없이 주는 상처가 더 잔인하다고 말이다.
여전히 전쟁 지역에 있는 척하던 다이앤은 LA 한 식당에서 우연히 미스터 피넛버터와 마주친다. 당황한 것도 잠시, 미스터 피넛버터는 건너편 테이블에 있는 다이앤에게 전화를 걸어 그곳의 안부를 묻고, 아무렇지 않게 리모컨 배터리가 없으니 당신이 와서 찾아달라고 말한다. 여기 식당에 다이앤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앉아 있다는 농담까지 더해서. (당시 나는 이 시리즈에서 미스터 피넛버터의 단순함이라면 그가 정말로 그게 다이앤과 똑같이 생긴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정확히 다이앤이 원하던 방식으로, 아무것도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불편한 기색 없이 다이앤을 집으로 받아주는 미스터 피넛버터의 관대함(?)에 나는 갑자기 적진에서 무장해제 된 것 같은 당혹감이 몰려들었다. 달콤하기보단 되레 혼란스러웠다. 이토록 단순하고 명쾌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아무 말 없이 천연덕스럽게 그녀를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워했던 그의 단순함이 문득 고마워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용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그럼 이건 그저 그가 단순한 사람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일일까?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이게 시즌 2까지의 이야기. 지금은 시즌 5가 끝난 상태고, 둘 사이엔 이런저런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해도 미스터 피넛버터를 향한 나의 복잡한 양가감정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모든 일이 복잡하고 어려운 다이앤 같은, 아니 실은 나 같은 사람에게 과연 모든 걸 단순 명료하게 바라보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미스터 피넛버터가 필요할까? 나는 여전히 어떤 확신의 대답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