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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07. 2019

내 인생은 좀 망한 것 같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서른 살. 대한민국에서 여자 나이 서른이면 못해도 대리나 주임 정도는 달았던가, 일을 그만두고 결혼이라도 했던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돈이라도 많아서 고상한 취미라도 즐기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이중 아무것도 못했다. 아-무-것-도. 평범한 직장인이라 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기분이 들어~ 이런 말이 아니고 정말로, 말그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음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이 서른에 놀고 있다. 수년째. 수년을 계속 놀기만 한 건 아니고, 이런저런 일들을 단기간으로 해보기도 하고 배워보기도 했지만 결국 이도저도 못 되고 대부분 놀면서 보냈다. 놀았다는 말도 머쓱할만큼 대부분 가만히 누워있거나 멍하니 앉아있거나 뭐 그런 시간이 많았다. 학창시절 시험을 앞두고 아 공부해야 되는데~ 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티비를 보던 수험생처럼 보냈다. 아 취직해야 되는데~. 그렇게 누워있다가 이대론 안되겠다 싶으면 알바비를 모아 여행을 갔다. 또 은근슬쩍 뻥을 친다. 알바라는 것도 20대 초반에나 했던거지, 아빠한테 꼬박꼬박 받는 용돈으로 생활하며 '모아져있는' 알바비로 여행을 갔다. 행복한 척. 잘사는 척. 


몇 차례 진지하게 일을 해보려다 실패했다. 몇 차례라는 것도 사실 뻥이다. 딱 두 번만에 포기했다. 어차피 포기한 거 마음이라도 편하면 좋으련만 그럴 리 없다. 어느 날은 '지금은 용돈을 조금씩이나마 줄 수 있지만 나의 노후까지는 보장해줄 수 없는' 집의 재정사정을 고민했고, 병원에 갈 때마다 불안이 엄습했으며, 어떤 날은 '이 나이에 제대로 된 커리어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좋아하는 일도 없는 데다가 성격마저 유약한' 내가 쪽팔려서 이불 밑에 숨어 지냈다. 주로 그냥 내가 한심하고 초라해서 우울했다. 가질 것 다 가졌고, 누릴 것 다 누리며 자랐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한 번도 이런 얘길 해본 적은 없다. 인터넷 공간에 익명으로도 이런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비난할 것 같았다. 동정도 싫어. 혹시라도 누군가 물으면 '일을 하다가 쉬고 있다'고 답했다. 몇 개월 일하고 몇 년을 놀아도 '일을 하다가 쉬고 있는' 것이다. 나의 보잘것 없는 커리어와 불안한 심리상태에 대해 나의 지인들은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하며 지내는 내 앞에서 누구도 선뜻 깊게 물어보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안전한 사람들만 곁엔 남겨두었다. 


갑자기 이런 글을 왜 쓰고 싶어졌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우울감이 커지면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울감이 커지면서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 내 망한 인생을 되돌아보다 보면 자꾸 내 망할 성격이 보였다. 지난 몇 개월은 나를 혐오하고 미워하고 불쌍해하느라 아무것도 못했다. 겁이 나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그래서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다보면 금새 슬픔과 불안이 몰려와 눈알 빠지게 울게 되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려고 미친듯이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주구장창 보다가 잠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때쯤 겨우 잠들고, 깨어있는 시간은 온통 멍하게 보내곤 했다. 그런 시간들을 어찌저찌 견디어 보내다보니 어느 순간 쓰고싶어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긴 글을 쓴다. 다시 메모장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모래늪처럼 한없이 가라앉던 수렁은 빠져나왔나보다. 우울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실은 덜 우울하다. 지금도 나는 모든 것이 무섭고, 무기력한 시간이 더 많고, 인생이 불안하고, 내가 혐오스럽지만, 왠일인지 그럼에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쓰면 나아질까 막연한 기대도 내심 하고 있다. 제대로 정리해낼 자신은 없지만 셀프 정신상담 같은 마음으로 내 망할 성격과 망한 인생에 대해서 틈틈히 써나가보려고 한다. 징징거리지 말라는 비난은 내가 스스로에게 충분히 해왔으니 접어주시길. 아직 젊고 인생 길어요 화이팅! 같은 말도 위로가 안 되는 망할 성격이긴 한데 그래도 비난보단 낫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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