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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끝 햇살 Apr 29. 2020

2-1. 아이가 맞고 왔어요 1

 자녀가 다른 집 아이에게 맞고 들어왔다면? 그게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조짐을 보인다면? 부모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일 일 것이다. 아이에게 왜 맞고 다니느냐고 힐난할 수도 없고, 너도 같이 주먹질을 하라고 부추길 수도 없다. 그렇다고 폭력은 안 되니 네가 참아라 할 수도 없다.


부모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아이가 맞고 오면 부모는 참담하다.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지고, 만감이 교차한다.

 하지만 여기서 부모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존중되어야 할 것은 아이의 감정이다. 아이의 기분을 물어봐야 한다. 어떤 심정인지, 맞고 나니 어떤 감정이 드는지, 부모가 어떻게 위로해주길 원하는지..... 감정을 다 헤아리고 난 뒤에 아이의 정서가 안정되면 아이가 사건의 추이와 인과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본인은 어떤 해결 방식을 원하는지, 가장 해결하고 싶은 지점은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건 부모의 절제력과 인품이다.      


발생한 사태를 되돌릴 수는 없다. 되돌리려고 애쓰지 말자.    

 아이는 이미 맞았고, 그걸 되돌릴 수는 없다. 때린 아이에게 사과를 받는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 빼기 1은 수학에서는 0이지만, 여기서는 맞은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어 때린 것을 갚는다고 해도 0이 될 수는 없다.

 관건은 다시 맞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이들에게 평생 다시는 맞지도 또 때리지도 않는 무풍지대의 아우라를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한 것이지, 엄마의 울분을 토해내고 아빠의 몰 이성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다.


 왜 맞았니?(왜 바보같이 맞고 다니느냐는 뜻),

 왜 맞고 가만히 있었니?(왜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주지 않았느냐는 뜻)


 간혹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아이를 다그치고 나서 아이의 옷깃을 잡고 가해자의 집으로 향한다. 가해자 집에 가서는 어제까지 친구였던 아이의 부모에게 아이를 폭력적으로 키웠다는 뜻으로 거세게 항의하고, 그 집 아이에게는 큰소리로 야단을 치며 훈계하고 다그친다. 부모의 격분과 울분을 다 쏟아낸 뒤, 아이의 의사와 아이의 욕구는 무시된 채 다시 부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부모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니 그 친구와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라거나 아니면 걔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일장 훈계를 남기고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낸다.


아이의 주도 하에 사태를 해결해야

 이렇게 되면 부모는 뭔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이는 지금까지 일어난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뭔가 부메랑 같은 게 휙휙 소리를 내면서 스쳐 지나간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어떤 형체였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귀 옆을 스칠 때 정신없이 피하다 끝이 났다는 느낌만 남아있다.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아이는 아직 맞고 난 후의 상기된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고 지금까지 부모의 주도로 진행된 사건의 추이를 제대로 파악할 여유가 없다. 부모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건의 진행과 결말을 보면서 자기가 맞은 사태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내지 못한 채 상황이 끝난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맞았다고 상상해 보자. 생각지도 못하게 느닷없이 맞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싸움과 분란의 과정에서 맞았을 수도 있다. 아마 우리는 사태 파악을 하는 일에 초점을 둘 것이다. 이게 우발적인 사고였는지 아니면 평소의 감정이 실린 것인지. 사태 해결은 이렇듯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나름대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 일은 아이가 할 일이다. 부모는 이 사건의 전개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거들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결하도록 놔두지 않는 부모들이 있다. 사건의 전개과정을 제삼자에게 듣고, 부모 나름의 기승전결 시나리오를 만든 다음, 자녀와 때린 아이 그리고 그 부모에게 자신의 해결 방식을 강요하면서 사건을 이끌고 나간다. 사건 발생 이후 맞은 아이와 때린 아이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 또한 아이들의 삶과 우정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사태 해결의 헤게모니를 쥔 부모들의 주도 아래 무시되곤 한다.


때리는 친구, 흔드는 부모

 아이는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모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런 사건을 통해 부모와 내가 속해있는 우주가 다르다는 것, 내가 맞으면 부모는 나와 상관없는 거대한 쓰나미를 만들어내는구나 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친구에게 맞았을 때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에게 폭력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아듣게 보여주고, 결국은 둘 사이가 마음으로 봉합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둘이 더 이상 친구로 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관계를 훼손시켜 놓고서야 손을 털고 자리를 뜬다.   

 아이의 감정이 아직 흥분상태에 있고 울음을 그치지도 않은 아이의 옷깃을 끌고 때린 아이 집에 가서 부모의 울분을 토해내면 안 된다. 아이는 “아! 맞는다는 것은 엄마가 흥분하고 그래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결국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팽개쳐지는 거구나.”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 뒤로는 맞아도 맞았다는 말도 안 하거나, 맞을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비굴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맞는 것보다 맞은 후에 부모에 의해 일어나는 후폭풍이 더 무섭기 때문에.


부모에 의한 후폭풍

 때로는 사건이 종결된 후에 엄마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가해자를 욕하고, 우리 애가 맞고 왔다고 하소연하면서 아이 자존심을 죽인다. 아이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죽을 지경이다. 창피하고 쪽팔려 죽을 지경이다. 이제 앞으로 친척 모임에는 다 갔다. 그래서 다음에  맞으면 말을 안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아이는 이 절차를 통해 맞고 사는 일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앞으로는 보고도 안 하게 된다. 그럼 아이가 맞고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아이가 부모를 믿게 될까?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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