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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끝 햇살 May 15. 2020

2-8직장 맘이라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없어요

우리 아이 왕따 문제 이럴 땐 이렇게

 직장에 다니던 엄마들이 아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고민에 빠진다.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이의 숙제도 챙겨주고, 초기에 놓치기 쉬운 기본 학습도 잡아주고, 친구관계도 엄마가 나서서 맺어주어야 할 텐데....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좀 더 애정과 관심을 주고자 하는 것은 엄마의 선택이지만 직장을 그만둔다고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온 목소리에 따른 것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던 상관없다.

 엄마가 집에서 챙겨줄 때 좋아지는 아이가 있는 반면,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잔소리해댈 때 더 나빠지는 아이도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는 엄마가 있는 반면, 집에 있을 때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는 엄마가 있다.


  아이가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라 나름 친구를 잘 사귀면 별 고민은 없지만 그렇지 않고 내성적이라서 친구와 사귀지 못할 때 엄마의 죄책감은 커져만 간다. 엄마가 친구와 잘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을 때 친구와 잘 노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친구와 잘 사귈 수 있다. 아이의 능력은 엄마가 환경을 만들어줄 때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내성적인 아이는 친구와 노는 일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친구와 맺는 즐거움은 아이마다 다르다.

 그래도 어릴 때 친구 사귀는 능력을 배양해주고 시행착오를 겪을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런 능력과 시행착오는 가정과 학교에 머무는 수업시간으로도 충분하다.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가정에서 관계의 안정성을 획득한 아이가 엄마가 직장에 갔다고 해서 친구관계를 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엄마의 지나친 고민은 어쩌면 자신의 부적절한 인간관계에 대한 투사 거나 아이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다는 간접적인 고백일 수 있다. 만일 그런 엄마라면 직장까지 그만두고 아이의 친구관계에 올인해봐야 큰 도움을 못 준다.


결국 엄마들의 계모임

 물론 엄마들이 모이면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끼리 시간을 많이 보낸다. 이 기회를 놓친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가 소외될까 봐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그룹이든 평생 지속될 수는 없다. 진급에 따라 반이 달라지면 모이기가 쉽지 않고 또 엄마들 그룹에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엄마들의 친목 속에 다져진 아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친구란 필이 꽂히는 인물에게 베푸는 호의와 관심으로 출발한다. 엄마의 친목 모임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라면 그때뿐일 가능성이 많다. 지속적으로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

 주변에서 엄마들이 아이 초등학교 엄마 모임이네, 중학교 엄마 모임이네 하면서 계모임을 지속하는 건 봤어도 정작 아이들이 동창끼리 친하게 지내는 경우는 못 봤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자녀들 결혼식에 자녀 친구들은 안 가고 계모임 멤버인 엄마들만 모여서 축하객으로 간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들은 각자 살아가고 엄마들끼리만 친목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결국 아이들에게 친구 만들어주려고 시작한 모임이 엄마들의 계모임이 되는 것이다. 엄마 계모임 유지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

 “내일은 딸 친구 결혼식에 가야 해. 우리 딸은 안 가고 나만 가. 중학교 졸업한 뒤로 애들끼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든. 그 애들은 서로 안 친해. 엄마들만 친하게 지내.”

     

 엄마 몇몇이 어울려서 이 집 저 집을 몰려다니고 거기에 그 아이들까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고 내 아이가 부러워하면서 군침을 흘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물론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쉬는 날 모처럼 그런 모임에서 하루 데려가면 아이는 정신을 잃은 듯이 놀고 나서 앞으로 매일 이렇게 놀게 해달라고 떼를 쓸 수는 있다. 그 말은 오늘 매우 신나게 놀았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일 뿐이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쳐지고 있다는 고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 손에 없는 것을 대하는 자세

 아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다. 만일 나도 저 아이들과 놀고 싶은데 무능력한 엄마 때문에 놀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치거든, 인생에서 내 손에 없는 것을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소중한 기회로 삼으면 된다. 사막에서 살면서 모래바람이 부는 것을 싫어해서는 사막에서 살 수 없다. 습도가 높은 곳으로 이사할 형편이 안 되면 그저 건조한 바람을 받아들이면 된다.

 아이가 자신의 친구관계에 벌써 부모 탓을 하기 시작했다면,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고 발 벗고 나선다고 아이의 친구관계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는 관계가 아니라 인생철학의 문제다. 부모 탓을 하면서 아우성치는 아이에게 휘둘리는 부모는 단언컨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흔들리는 부모임이 분명하다. 부모가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한 대처 의식이 있으면 아이가 그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고, 부모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리도 없다.      

 

 “엄마, 저 집 차는 벤츠인데 왜 우리 집에는 차가 없어?”

 “저 애는 방학 때마다 시골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서 신나게 논다는데 왜 우리는 시골에 사는 외할아버지가 없어?”

 “저 애는 아빠가 신형 컴퓨터에 게임기 그리고 최신 휴대폰을 매번 바꾸어준다는데 왜 나는 안 사줘?”     


 아이의 이런 말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부모라면 다음과 같은 말도 잘 대처할 수 있다.     


 “누구네 엄마는 직장에 안 다니고 매일 집에서 맛있는 거 해주는데 엄마도 그러면 안 돼?”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나는 내 영역의 제한된 한계 안에서 살아가리라는 것'

 '그 한계를 극복하거나 깨뜨릴 수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일상의 내 영역은 여기라는 것'


 이 교육의 출발은 부모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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