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 왕따 문제 이럴 땐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서 한 번쯤은 아이가 하는 거짓말을 듣게 된다. 거짓말을 지적하면 아이는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하고 그렇다고 딱히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뭐라 딱 집어 말하기 애매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증거가 있다한들 아이가 펄쩍 뛰는데 그 증거를 코앞에 들이대면서 막장 드라마를 쓸 수도 없다.
숙제도 공부도 가난도 왕따와 무관하고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거짓말은 다르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거짓말 습관은 고치지 않으면 인생을 망친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솔직하게 말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지 워싱턴이 실수로 벚나무를 쓰러뜨리고는 혼날 각오로 솔직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지만 우리 아이는 현실에서 그런 용기가 없다.
왜냐하면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 ‘내 부모가 어디까지 수용해 주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이미 파악이 끝났다는 뜻이니까.
“아이가 거짓말을 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가 어떤 거짓말을 하나요?”
“학원에 안 가놓고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해요.”
“아이가 학원에 가기 싫어하나요?”
“네, 안 간다고 하는 걸 설득해서 보냈어요. 안 빠지고 다닌다고 나랑 약속했는데 벌써 몇 번째인지.”
“어머니가 바라는 건 아이가 학원에도 잘 가고 거짓말도 안 하는 거지요?”
“네.”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애를 학원에 억지로 가라고 했으니 아이가 안 가는 게 당연하고요, 학원에 빠진 게 발각 나면 혼날 테니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학원을 빠져도 혼내지 않아야 아이가 거짓말을 안 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엄마가 학원을 고집하면 아이는 학원도 안 갈 것이고 계속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학원을 안 갈 수는 없잖아요?”
“그 길이 바로 아이를 거짓말쟁이로 키우는 길입니다.”
“그래도 학원은...”
“학원 안 다니고도 훌륭한 사람 되는 건 많이 봤지만 거짓말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 되는 건 못 봤습니다. 선택은 부모님이 하셔야 합니다.”
부모는 여기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학원을 끊던지, 아니면 학원을 심심찮게 빠져도 수용해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엄마와 아이 사이에 어떤 전쟁이 오갈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전쟁만 치르면 괜찮은데 거짓말은 삶을 구차하게 만든다.
누구나 아는 이 단순한 사실을 막상 부모가 되면 왜 그리 안 보이는지. 상담을 통해 어느 순간 깨우친 부모들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큰 충격에 빠진다.
“참 어리석었네요.”
“내가 그런 멍청한 길을 밟아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아이도 많이 힘들었겠네요.”
위의 경우는 부모가 간접적으로 아이의 거짓말을 조장한 경우지만, 부모가 아이의 거짓말을 직접 가르치는 경우도 봤다. 예를 들면 아이의 숙제를 부모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서 아이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선생님한테 숙제도 안 해온 아이라고 손가락질받을까 봐 다신 이러지 말라고 해주는 것이지만 이건 명백히 아이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행위다.
숙제는 아이에게 내 준 것이고 그러니 아이가 해야 마땅하지만 그걸 부모가 대신해준다면 약속위반이다. 그런 행위를 공공연히 한다면 아이는 거짓말을 배우게 되고 무책임을 배우게 된다. 여기에 가끔 선생님까지 결탁해서 어찌 되었든 가정에서 숙제는 해 보내야 한다고 압력을 넣기도 한다. 아이가 숙제를 꼭 해야 한다는 개념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숙제가 완성되어있기만 하면 된다는 부모들이 많다. 불행스럽게도 이런 부모의 아이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이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실대로 말하면 혼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독서실에 간다고 하고서 하의실종 패션으로 탐앤탐스에 앉아 있는 것을 옆집 아줌마로부터 들었다고 하자. 아이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그곳에 간 적이 없으며 옆집 아줌마가 본 것은 다른 아이였을 거라고 딱 잡아뗀다. 여기서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엄마가 독서실 대신 탐앤탐스에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아이에게 독서실 대신 탐앤 탐스에 가면 안 된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아이와 엄마가 고성이 오가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 즉, 탐앤탐스에 간 게 맞냐, 아니 안 갔다, 누가 봤다더라, 아니 절대로 안 갔다 등의 말을 주고받는 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상담실에 와서 아이를 못 믿겠다고 하소연하는 엄마들이 정작 아이와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지칠 때쯤 “난 널 믿어.”라고 말한다. 글쎄 이 말을 어쩌자고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엄마가 너를 믿는 척해줄 테니 앞으로는 똑바로 처신해라’라는 뜻인지, 아니면 ‘이 정직하지 못한 놈아, 어때? 엄마가 믿어준다니 뜨끔하지?’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왜 믿지도 않으면서 어떤 부모들은 밑도 끝도 없이 믿는다고 하는 걸까?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이번에 엄마의 의혹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지금은 엄마가 널 믿기 어려운 상황이구나.”
“우리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의견은 어떠니?”
라고 물은 뒤에 아이가 자기주장을 하면서 자기가 진실을 말했다고 하면 그때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 네가 그렇게 주장하니 네 말을 믿어보기로 하겠다.”
이 말은 아이의 말을 경청했다는 증거이자, 아이의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말이다. 아이에게 남과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봉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산교육이기도 하다. 이 말 말고 앞뒤 잘라먹고, 표정은 안 믿는 것이 분명한데도, 방금 전까지 귀 막고 자기 말만 하다가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난 널 믿어.’라는 말을 뜬금없이 던지면 아이는 혼란에 빠진다.
언제부터 믿었다는 것인지, 왜 갑자기 믿게 되었다는 것인지, 내가 내세운 어떤 증거를 가지고 믿게 되었다는 것인지, 전혀 믿어주지 않는 저 표정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혼란의 블랙홀에 빠지게 만든다.
결국 엄마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거짓말’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꼴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는 혼란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을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낫다. 학원을 빼먹고 거짓말을 한다면, 학원 출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을 하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결석할 자유를 원하는 건지, 아예 학원 같은 것은 다니고 싶지 않은 건지 아이의 의사를 물어 서로의 욕구를 조정하는 것이 좋다.
독서실 대신 탐앤탐스에 가는 딸에게는 무작정 ‘거기에 가지 마라’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서로 납득할만한 횟수를 정해서 가도록 여유를 줘야 한다. 어차피 독서실 대신 카페에 가는 것은 분명하고, 앞으로도 갈 것이 더욱 뻔한 데다 여기서의 쟁점은 카페 출입이 아니라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중고생이 카페에 가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다.
그러다가 더 나쁜 곳에 가면 어떻게 하냐고? 오히려 아이를 거짓말로 밀어 넣고 스트레스를 주면 엄마 눈에 띄지 않는 나쁜 곳으로 갈 위험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부모는 이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쉿, 너무 우니까 밖에서 망태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
우는 아이 그치게 하려고 하는 말인데 아이는 결국 실컷 울지도 못하고 징징거리게 되고 나중에 커서 이 아이는 울고 싶은 상황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릴 수 있다. 우는 원인을 알고 감정을 발산하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아무 관련 없는 협박으로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식이다.
아이가 왜 우는지 물어봐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고, 만일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원하면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한 뒤 아이의 슬픈 감정을 알아주면 된다. 슬픔이 다할 때까지 울도록 기다려주면 된다.
“밥 안 먹으면 친구들이 싫어해서 안 놀아준대. 밥도 안 먹었다고 친구들이 놀릴걸?”
밥 먹기를 권유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식사량에 따라 친구들과의 관계가 규정된다고 하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게 된다. 밥과 친구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밥을 안 먹는다는 건 배가 안 고프다는 이야기이고, 밥은 배가 고플 때 먹으면 된다. 늘 식사시간을 놓치고서 중간에 배가 고프다고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면 식사시간이 아니면 식사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말을 분명히 설명하고 나서 다음 식사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면 된다.
아이가 늘 안 먹어서 영양실조가 걸릴 지경이라면 더더군다나 다른 협박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 좀 더 과학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아니야, 엄마 어디 안가. 그러니까 걱정 말고 놀아.”
엄마가 아이 몰래 외출할 때 쓰는 거짓말이다. 전에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아빠가 따라오려는 작은 아이에게 했던 말과도 비슷하다. 방송에서는 따라오려는 작은 아이에게 신발을 갈아 신고 오면 데리고 가겠다고 하고는 아이가 신발 갈아 신으러 올라간 사이 큰 아이와 함께 줄행랑을 쳤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불신과 불안을 동시에 얻는다. 세상과 부모와 사람에 대한 불신, 그리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높아진 불안감으로 심약해지거나 떼쟁이가 된다. 아이는 잘 놀다가도 가끔 엄마가 있나 없나 확인하려 들 것이고, 자기를 떼어놓고 간 부모에게 분노와 원한을 표현할 것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아무리 아이가 울고불고 넘어가도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 몇 시까지는 돌아오겠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 안에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아무리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몰래 나가서는 안 된다. 외출할 때 아이에게 중요한 사람의 부재를 반드시 알려야 하고, 약속된 시간이면 돌아온다는 것을 믿게 해야 한다. 엄마가 내 곁에 없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를 두고 떠나면서 몰래 나가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몰래 나가는 것은 아이의 불안만 더욱 크게 만드는 일이다. 게다가 그건 명백히 거짓말이다.
'엄마가 외출하는 것은 내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약속한 시간이 되면 엄마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
이것이 아이에게 보여주는 신뢰의 출발이다.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두세 번의 신뢰를 보여주면 아이는 믿기 시작한다. 이런 신뢰회복 과정을 통해 엄마의 외출 여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과 엄마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차츰 안정적인 아이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