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중학교 때 쓴 일기입니다.
오늘도 그린이는 눈을 뜨자마자 TV를 켠다. 몇 시간이 지나 TV 웅웅 거리는 소리에 현기증이 나서 그만 끄라고 하니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바로 끈다. 공부도 안 하고 책도 안 읽고 TV와 컴퓨터로 소일하는 아이를 보면 걱정도 되고 속이 뒤집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면 우리 부모님이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우리 집에서 처음 TV를 샀는데 엄마 아버지의 생활공간인 안방에 TV를 두었다. 주말에는 주말 내내, 주말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명절 연휴에는 연휴가 끝날 때까지 매일 TV 앞에 붙어 앉아있는 내게 부모님은 한 번도 이제 TV 그만 보고 네 방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에도 우리 부모님 인품이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하면서 TV를 보곤 했다. 지금은 케이블이다 뭐다 해서 하루 종일 TV를 해서 그때와는 다르게 더욱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나도 우리 부모님과 같은 인품으로 살아볼 일이다.
이 아이는 지금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사춘기였나? 우울증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기황후’나 ‘시크릿가든’처럼 지나간 드라마를 대사까지 외워가며 보고 또 보고 또 볼 때면 한심한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사실 내가 못 견뎠던 건 “TV도 좀 쉬게 하자”는 말(진심이었습니다. 비싸게 주고 산 LCD TV가 망가질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에 “그럼 이제 뭐해?”하며 소파에 엎드려 머리와 팔을 소파 밑으로 축 내려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슨 영화 ‘링’도 아니고 머리를 숙여 소파 아래로 늘어뜨리고 숨만 쉬고 있을 땐 나도 숨이 막혀왔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TV를 좋아하고 소파를 좋아하고 먹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좋은 게 하나도 없으면 좋은 걸 찾아 밖으로 나갔겠지.... 밖이 더 좋은 걸 제공하는데, 부모가 잔소리만 하면 가출하겠지... 이렇게라도 집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아이는 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합니다.
“엄마, 과제를 해보면 내가 쫌 미적 감각이 있는 것 같아.”
“당연하지. 남들 국영수에 매달린 12년 동안 너는 드라마랑 예능만 봤으니... “
“큭큭...”
“너 그거 알아? 드라마는 국내 최고의 영상 기술자들이 만든다더라. 영상미는 드라마가 최고래. 아! 엄마도 드라마 열심히 봤으면 지금 사진 동호회에서 감각으로 발리지는 않을 텐데...”
“뭐 드라마가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뿐 아니라 초등학교 때 ‘읽기 장애’ 판정을 받고 공부라곤 ‘1’도 안 한 꼴찌 아이가 수능 국어 3등급(다른 과목은 좀 더 잘 봤습니다)을 맞은 건 8할이 드라마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2할은 웹소설이고요. 이 이야기(읽기 장애에서 탈출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요.
공부 안 하는 걸로 아이와 싸우지 마세요. 범죄행위만 아니면 그 시간에 뭘 하든 다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